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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중녕산 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9:06

기(記)
 
 
중녕산 황보성기(中寧山皇甫城記)
 

중녕산에 성을 쌓는 것은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하는 일이다. 고을이 큰 바다 언덕에 위치하여 겨울에도 푸른 초목이 많다. 옛날에는 낙토(樂土)라고 일컬었다. 인종왕비(仁宗王妃)인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가 의종(毅宗)ㆍ명종(明宗)ㆍ신종(神宗)의 세 임금을 낳아 서로 이어서 왕위에 오르고, 장흥(長興) 고을이 옛날에 비하여 풍년이 잘 들었다. 군(郡)에서 목(牧)으로 승격하였으니, 특출한 것을 극진히 드러내어 표창한 것이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다스리는 일은 간소하여 이름난 어진이와 재주있는 대부들로 조용히 다스릴 뿐 다른 공리심이 없는 자가 많이 이곳의 수령이 되었다. 지정(至正) 경인년 이후로는 일본 섬 오랑캐들이 몰래 침입하여 난리를 일으키고 밤에 왔다가 날이 새면 문득 달아나곤 하였다. 국가에서 사태를 가볍게 여겨 염려하지 않으니, 왜구는 날로 더하고 달로 성대하여 백주 대낮에 침입하여 열흘씩 한달씩 제멋대로 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닷가의 민가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번번이 대장을 파견하여 쫓아 보내면 조금은 안정이 되었다. 그러나 형세는 궁하게 되고 사태는 절박하게 되니, 백성들을 다른 곳에 옮기라는 명이 내렸다.
장흥의 치소가 철야현(鐵冶縣)에 흘러 들어가 붙어 있게 된 해가 기미년이고, 보성군(寶城郡)에 합쳐 들어간 해가 기사년이다. 제후가 나라를 잃으면 다른 제후에게 붙여 있는 것은 비록 예법으로는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곳 출신인 사대부로서 향리에 늙어 은퇴한 자와 뜻있는 아전과 백성 중 거센 자들은 다 마음에 분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장흥부는 은대(銀帶) 이상의 관원이 다스리는 곳인데, 지현(支縣)의 지관(知官 수령)에 붙어서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고, 사마귀나 혹처럼 달려 있으니 너무나 부끄럽지 않는가!” 하였다.
금년 봄 2월에 부사 황보공(皇甫公)이 부임하는 수레에서 내리니, 부로(父老)들이 그 사유를 진정하였다. 황보공이 말하기를, “그 말이 옳다.” 하고 안렴사 이원(李原)에게 자세하게 보고하였다. 이공(李公)도 “그 말이 옳다.”고 하고 이웃 고을에 통첩을 내려 장정 3백 50명을 뽑아 보내었다. 17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 27일에 준공하니, 성(城)의 높이는 15척(尺)이고, 두께는 6척이며, 주위는 1천 5백 척, 동서(東西) 2칸으로, 문지방과 빗장은 높고 견고하며, 파수병의 경비 소리는 밤에도 끊어지지 않고, 낮이면 나무꾼과 목동에게 열어주어 나가서 일하고 들어와서 휴식하는 데 편하게 하니, 백성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즐겁게 처자를 보양할 수 있고, 북쪽으로 달아나야 하는 위험이 없어졌다. 사대부와 아전과 백성들의 소망이 이제야 부족함이 없게 되었다. 봉수(封守)를 굳게 하고 부역을 공급함이 여유가 있었다. 《서경》에 말하기를,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굳게 한다.” 하니 무엇이 불가하리오.
공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절도사 김용초(金用貂) 공에게 알리기를, “인부들이 무기를 가진 것이 없고 바다가 가까우니, 군관(軍官)을 보내어 불의의 변고를 방위하게 하십시오.” 하였다. 김공이 20명을 보내 왔다. 전농 부정(典農副正) 이운기(李云起), 중랑장(中郞將) 정을충(鄭乙忠)과 김길(金吉), 낭장 양세(梁世) 등이었다. 고을 사람으로서 공사를 감독한 자는 전(前) 승봉랑(承奉郞) 송원비(宋元庇), 낭장 고적(高迪), 산원(散員) 신득귀(申得貴)ㆍ김을보(金乙寶)ㆍ형방언(邢方彦), 검호군(檢護軍) 고천경(高天景)ㆍ조한귀(曺漢貴)ㆍ고중학(高仲鶴), 영동 정(令同正) 임보(任寶)ㆍ위언(魏彦)ㆍ오보만(吳甫萬)ㆍ조생철(曺生哲)ㆍ장용세(張龍世)ㆍ김성기(金成奇)ㆍ위의(魏宜)ㆍ강인덕(姜仁德)이며, 호장 신봉한(申奉閒)은 공급을 주관하였고, 호장 오인교(吳因敎)와 문기관(文記官) 조수(曺修)가 공사의 전체를 관장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은 완성하였으나, 식량이 또 급하다.” 하였다. 그런 까닭에 쌀 20석을 의재(義財)로 하여 아전으로 하여금 교대로 주관하게 하고, 원 물품은 그대로 두고 이식만 사용한다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사신과 빈객을 공궤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도 아울러 기문에 쓴다.
나는 현릉(玄陵)의 재상으로서 위조(僞朝) 에 벼슬하는 실신(失身)을 범하였으니, 죄가 마땅히 베임을 받아야 할 것인데, 금상께서 옛일로 의논하여 교서를 내리시어 서인(庶人)이 되게 하고, 또 전례대로 편의대로 하라는 명을 내리시어 내일이면 마땅히 서울로 가야 할 것이다. 황보공(皇甫公)이 기문을 청하므로 곧 이렇게 쓴 것이다. 공(公)은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여 백성들이 즐겁게 따른다. 그러므로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주D-001]은대(銀帶) : 종 6품 이상 경 3품까지의 관원이 받는 은으로 만든 띠.
[주D-002]위조(僞朝) : 고려 공민왕의 후계자인 우왕(禑王)과 그의 아들 창왕(昌王)을 신돈(辛旽)의 자손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