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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청주목 제용재기(淸州牧濟用財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9:01

기(記)
 
 
청주목 제용재기(淸州牧濟用財記)
 

청주(淸州)는 양광도(楊廣道)에 있는 목(牧)으로 충주와 공주에 접경하고 있다. 토호가 많으며, 아전은 법을 받들고, 백성들은 꽤 순하였다. 그러나 목사로 오는 사람은 어떤 이는 관대하고 어떤 이는 사납고, 어떤 이는 구차하게 있다가 전임해 가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곳의 아전과 백성들도 다른 고을과 다른 것이 없다. 곡식을 공출하여 공용(公用)을 받들고 관(館)의 양식을 풍부하게 하여 빈객을 대접하는 일들이 거의 일정한 법이 없었다. 혹은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하니, 백성은 이 때문에 곤궁하게 되고 아전은 이 때문에 횡포해져 폐단이 생긴 지가 오래되었다. 그중에서도 간혹 관대함과 사나움을 알맞게 하며, 폐지되고 실추된 것을 정비하여 밝혀도 역시 모두가 한때의 일에 그치고 말았다. 강령을 세워 오래도록 전할 만한 제도로써 위와 아래의 잘못된 빈틈을 꿰매어서 묵은 폐단을 제거하고 아전과 백성을 안정하게 만든 것은 대개 드물다.
용구(龍駒) 이모지(李慕之)는 나의 성균관 생도였다. 동료들이 그의 학문을 칭찬하였는데, 마침 집정관(執政館)이 이군(李君)을 알고 천거하여 참관(參官)이 되었는데, 근래의 전례에 참관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으므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과거에 급제한 자와 비교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가 청주를 다스린 것을 보면 충분히 그의 학문을 알 수 있다. 내가 드물다고 말한 경우가 이모지(李慕之)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청주가 왜구에게 유린되어 거리와 마을은 텅비고 고을은 유지할 수가 없었다. 이모지가 그곳 수령으로 임명을 받고 부임하여, 묻고 찾고 계획하며 따뜻이 품어주고 어루만져주니 2년만에 은덕과 혜택이 흡족하여 백성들은 친애하고 아전들은 법을 지키게 되었다. 선정의 명성이 조정에 들리게 되어, 당연히 전임시켜야 할 경우에도 전임시키지 않고, 그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풀게 하였다. 이모지 자신은 비록 오랫동안 외직에 곤란을 당하였으나, 조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현저한 것이다.
이모지가 오랫동안 절약하여 백미(白米) 20석, 조 70석, 좁쌀 80석, 메밀 30석, 베 1천 필을 저축하였다. 베와 쌀은 쓰면 없어지는 것이다. 물품을 세워두고 이식(利殖)만을 받아쓰게 하여 계속 유지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생각하기를 “내가 가고 대신으로 오는 사람마다 나의 마음과 같다면, 원 물품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 그렇지 않다면 이식이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그렇게 되면 나의 방침은 몇 년 되지 않아서 반드시 폐지될 것이다. 아, 상심되는구나.” 하였다. 또 염려하기를, “입으로 일러주고 붓으로 써서 전하는 것은 그 방법을 극진히 한 것이다. 그러나 전해주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혹 업신여길 것이다. 만약 당대의 문장가가 이 일을 기술한다면, 반드시 널리 전파될 것이다. 청주 사람들이 비록 나의 현판은 불태우더라도 끝내 없애지는 못할 것이다.” 하였다. 훗날 목사된 자가 이 기문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묻기를, “기문이 이와 같은데 지금 그 쌀과 베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그 불지른 사람은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드디어 나 한산자(韓山子)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문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백씨(伯氏) 판각공(判閣公)이 뒤따라 집에 찾아왔는데 나는 태사(太史)의 관직에 있다. 선한 일을 들으면 반드시 써야 하기에 기문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