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중방 신작공해기(重房新作公?記)
홍무(洪武) 계해년 겨울 10월 초하룻날, 응양호군(鷹揚護軍) 배구(裵矩)가 그들의 반주(班主)인 밀직(密直) 최공(崔公)의 말을 갖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 중방수조기(重房修造記)를 지어달라고 감히 선생을 번거롭게 합니다.” 하고 곧 공사의 기록을 내보였다. 대청(大廳)이 3칸, 서편 마루가 3칸, 다락의 곳간이 3칸, 남쪽 행랑이 9칸, 문(門)이 1칸인데, 단청으로 채색을 하고 밖에는 담을 둘러쌓았다. 역시 하나의 큰 공사였다. 재목은 값을 주고 샀으며, 부족한 것은 도통(都統)인 최 시중(崔侍中 최영)이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의 베 2백 50필을 보조하였다. 근장내상감문위정(近仗內廂監門尉正)이 군사들을 반으로 나누어 공사에 나갔는데, 공인과 장인은 중으로서 집에 있는 자들이 고용(雇傭)되어 다투듯이 나아갔다. 수레를 세내어서 재목을 실어 들이고, 관원을 보내어 공사를 독려하였다. 5월 24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준공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어떻게 그리 능하게 했단 말인가. 관청에 이러한 공사가 있었으나 백성들은 알지 못하였으며, 위에서 하는 일이 있을 때 아래에서 서로 권면하였으니 근래에 드문 일이다.” 하니, 동역관(董役官)이 말하기를, “대호군은 정 승가(鄭承可)이며, 정승가가 마치려 할 때 관청에서 파견하여 대신한 자는 염치중(廉致中)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공사를 감독한 이는 오직 배군뿐이다.” 하였다. 그 밑에 낭장 최유(崔愉)ㆍ김을정(金乙鼎), 별장 배천석(裵天碩), 산원(散員) 윤영렬(尹英烈)이 있었고, 또 그 아래에는 도장교(都將校) 원을부(元乙富), 서자(書者) 이임발(李林發), 서역(書役) 정규부(鄭圭夫)가 있었다. 이 역사는 반주(班主)가 지휘하였다. 아래로 서역(書役)에 이르기까지 모두 관련하여 이름을 쓰게 되었으니,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생각하기에 문(文)과 무(武)가 국가의 쓰임이 되는 것은 몸의 두 팔과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진실로 어느 한쪽을 폐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기에는 치란이 있고, 쓰임에는 경중이 있기도 한다. 이제 나라에 어려움이 많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조정에서 결속해야 한다. 무반(武班)의 관직은 나라의 간성(干城)이고 조아(爪牙)이며, 나라의 사명(司命)인 것을 알 수 있다. 최공(崔公)은 충직하기로 유명하여 임금에게 알려져서 국가의 기밀을 관장하는 데 참여하게 되었다. 최공은 온화하고 공순하여 조정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존경하고 사모한다. 군사들과 장교들이 잘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을지라도 뛰어나와 싸울 것을 반드시 기약할 수 있다. 하물며 청사를 건축하는 것같은 이런 작은 공사임에 있어서랴.
나는 나이 15세 때에 아버지의 음덕으로 과거도 보지 않고 별장(別將)의 직위를 받았으니, 역시 응양위(鷹揚衛)의 한 옛 장교인 것이다. 반주(班主)가 글을 요구하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또 무관(武官)은 간소한 것을 숭상한다. 그런 까닭에 바로 일 자체만을 기록하고 감히 말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반주(班主)는 서반(西班)을 주재하는 자이니, 8명의 상장군(上將軍) 중에서 가장 존귀하다. 그런 까닭에 양부(兩府)의 재상들이 그 직책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다.
'▒ 목은선생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記) 청주목 제용재기(淸州牧濟用財記) -이색(李穡)- (0) | 2007.04.21 |
---|---|
기(記) 남양부 망해루기(南陽府望海樓記) -이색(李穡)- (0) | 2007.04.21 |
기(記) 적암기(寂菴記) -이색(李穡)- (0) | 2007.04.21 |
기(記) 청주 용자산 송천사 나옹진당기(靑州龍子山松泉寺懶翁眞堂記) -이색(李穡)- (0) | 2007.04.21 |
기(記) 고암기(?菴記) -이색(李穡)- (0) | 2007.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