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고암기(?菴記)
이색(李穡)
상인(上人) 승(昇)이 현릉(玄陵 공민왕)의 지우(知遇)를 얻어 광암사(光巖寺)에 머무른 지 10년이나 되었다. 일찍이 현릉이 ‘일승고암(日昇?菴)’이라고 네 글자로 쓴 친필을 하사받았다. 여러번 사퇴하고 가기를 청하였으나, 마침내 현릉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금상이 즉위한 후에 무릇 세 번이나 사퇴하려 하였으나 또 윤허하는 명을 얻지 못하자 드디어 몸을 빼내어 돌아갔다. 상당(上黨) 한 선생(韓先生)이 신륵사(神勒寺)에서 만나니, 상인(上人)이 선생을 통하여 한산자(韓山子)에게 고암기(?菴記)를 쓰라고 부탁하였다.
한산자가 막 붓을 잡으려 할 때 마침 성산(星山) 이자안(李子安)씨가 왔다. 한산자가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붓을 주고 말하기를, “그대가 나를 대신하여 말하여 주겠는가?” 하였다. 자안(子安)씨가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고(?)라는 글자는 날 일(日)와 나무 목(木) 자로 되었으니, 해가 나무 위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상인(上人)이 살고 있는 곳이 동해의 언덕이니 바로 해돋는 곳입니다. 해가 돋을 때는 함지(咸池)에 미역감고 부상(扶桑)에 솟아오른다고 하니, 이것은 고(?) 자가 날 일(日) 밑에 나무 목(木)을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가 일찍이 남쪽으로 계림(鷄林)에 유람할 때 불일사(佛日寺)의 동쪽 봉우리에 올라 아직 천지가 나누어지지 않은 광대하고 몽롱함 속에 서서 큰 바다를 굽어보았습니다. 때가 이른 새벽이어서 빛을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물과 하늘이 아래 위에서 잠깐 밝아졌다가 곧 어두워지고, 잠깐 붉었다가 곧 검어지곤 하여 그 변화가 몹시 빨라서 정말 놀랐습니다. 조금 있으니 태양이 뛰어 나와 갑자기 하늘로 올라왔습니다. 밝은 빛이 찬란하여 털끝도 셀 수 있을 것같았습니다. 아까 말한 부상(扶桑)이 눈 안에 있는 것같아서 나는 진정 가슴이 시원하였습니다. 지금 상인(上人)도 일찍이 이를 관람하였는지요. 그가 ‘고암(?菴)’이라고 암자의 현판을 단 뜻을 모르겠습니다마는 유학하는 선비로서 말한다면, 명명(明命)이라 함은 하늘로써 말한 것이고, 명덕(明德)이라 함은 사람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명명(明命)을 돌아다보며 명덕을 밝히는 것은 배우는 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철부지 어린이도 자기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밝은 측면입니다. 어린 아기가 우물로 기어 들어가려 하는 것은 마음의 어두운 측면입니다. 완전히 밝지도 못하고 완전히 어둡지도 않은 것은 배우는 자의 공부가 아직 정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배움에 빛이 있어 광명이 온 천하를 덮는 것은 배우는 자의 최대한의 공력(功力)이며 성인(聖人)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해가 부상에 솟아 하늘에 올라서 비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상인(上人)이 강남에 노닐면서 통달한 선비들과 두루 만나보았으니, 그의 배움이 깊다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중국의 학문과 현인(賢人)들과의 교제에서 한마디 유익한 말을 찾아 얻었는지, 반드시 지금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은 말로써 일러준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산자(韓山子)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뒤에 마땅히 승상인(昇上人)을 볼 것이니, 그것을 물어보리라.” 하였다. 드디어 그대로 적어서 기문을 삼았다.
[주D-001]한산자(韓山子) : 필자 이색(李穡)이 자신을 가리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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