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적암기(寂菴記)
화엄종의 고승 경원(景元)이 흥왕사(興王寺)에 머무른 지 얼마 안 되어 속세의 번다함을 끊어버리고 뜬구름과 흐르는 물 사이에 초연하게 살면서 장삼과 나물밥으로 일생을 지내려고 한다. 의기는 호방하고 심지는 깨끗하여, 보는 사람마다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다. 내가 벽사(?寺) 에 왕래할 때 비로소 마음으로 사귀었다. 경원공(景元公)이 일찍이 나옹(懶翁)을 스승으로 섬겼더니, 나옹이 경원공의 암자를 적암(寂菴)이라고 이름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이제 한맹운(韓孟雲) 선생이 크게 쓴 글씨를 얻어 암자의 현판을 만들고, 나의 글을 요구하여 기문으로 삼으려 한다.
또 말하기를, “이각(二覺)이 적(寂)에 귀일하는 것은 교(敎)의 극치이며, 삼관(三觀)이 적에 마치는 것은 선(禪)의 극치입니다. 공행(功行 공덕과 수행)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도 이미 끊어버리고, 사리를 아는 견해도 세우지 않습니다. 영가(永嘉) 스님의 시비(是非)를 함께 잊고, 바로 달마(達磨)의 공덕에 투철하려 하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그러나 선생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내가 산에 있으니 낮에는 한 마리 새도 울지 않고, 밤이면 외로운 달이 또 떠오를 뿐입니다. 물은 꽃 사이를 흐르고 눈은 소나무 위를 누릅니다. 혼자 있어도 본래 고요하지만 여럿이 살아도 역시 고요합니다. 고요함의 맛있음은 혀로는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이 까닭으로 나의 암자를 적암(寂菴)이라고 현판을 단 것입니다. 내가 보니 선생께서는 왁자지껄한 것은 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나의 도(道)를 반드시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대략 이각(二覺)ㆍ삼관(三觀)ㆍ달마ㆍ영가의 설(說)을 들어 말하고, 끝으로 산중(山中)의 일을 말하였는데, 선생은 그 어느 것을 취하시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 유학자들이 복희씨(伏羲氏) 이래로 지켜서 서로 전해 오는 것은 역시 고요함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족한 나도 감히 그 전통을 떨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태극은 고요함의 근본입니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정지하여 만물이 화육(化育)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고요함의 다음입니다. 한번 감동하고 한번 감응하여 모든 선(善)한 것이 유행합니다. 이런 까닭에 《대학》의 강령(綱領)은 고요히 안정함에 있는 것이니, 고요함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중용》의 가장 중요한 점은 스스로 경계하고 두려워함에 있으니, 고요함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계구(戒懼)함은 공경함이고, 고요히 안정함도 역시 공경함입니다. 공경함이란 한 가지에 전념하고 다른 데로 가지 아니할 뿐입니다. 한 가지에 전념하게 한다고 함은 지키는 바가 있음이요, 다른 데로 감이 없다는 것은 옮기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지키는 바가 있고 옮기는 바가 없다면 고요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태평하게 다스리는 것은 정치의 밝은 공효이며, 만물이 제 자리에서 잘 육성되는 것은 도덕의 큰 효험입니다. 스님의 고요함이라는 것도 역시 보리(普利 보리(菩提))ㆍ함식(含識)의 근원입니까, 혹은 그 형태는 고목(枯木)같고 마음은 차가운 재처럼 되어서 적막한 것에 굳어버린다면, 우리 유자(儒者)들이 새와 짐승과 더불어 무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우리 유학자가 물(物)을 끊는다면 석가여래의 죄인인 것입니다. 나와 적암(寂菴) 스님은 마땅히 스스로 잘 도모하여 한쪽에 치우치는 것에 흘러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산중의 고요함같은 것은 스님에게 속한 것이고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 내가 어찌하겠소 내가 어찌하겠소.” 하였다.
[주D-001]벽사(?寺) : 벽사는 여주(驪州)에 있는 신륵사(神勒寺)를 벽절이라고 그 지방 사람들이 말한다. 그것은 그 절의 탑이 벽돌로 쌓은 것에 유래하는 말이다.
[주D-002]영가(永嘉) : 당(唐) 나라 온주(溫州) 영가(永嘉)의 현각(玄覺)스님을 가리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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