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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고암기(古巖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8:44

기(記)
 
 
고암기(古巖記)
 

신해년 조계(曹溪)의 대선(大選)인 천긍(天亘)은 나와 동년(同年) 급제한 최 병부(崔兵部)의 아우이다. 병부의 아우가 있다는 것은 들은 지 오래이나 그가 석씨가 된 줄은 알지 못했었다. 광암(光巖)에서 만나 그 얼굴이 병부와 같은 것을 보고 나는 더욱 놀랐다. 병부가 아들이 없는데 아우가 또 이 같음은 어찌된 일인가.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나의 호는 고암(古巖)이니, 귀곡(龜谷)이 명명(命名)한 바이다. 내가 좋아하는 바는 옛것이요, 사는 곳은 바위 속이다. 옛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과 어긋나고, 바위 속에 살기 때문에 평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내가 처음 배울 적에는 높이 옛사람과 벗하기 위함이요, 세속을 피하기 위함이었지, 승려를 진체(眞諦)로 높인 때는 아니었다. 선생께 한 마디 말을 청하여 스스로 법 받고저 한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동년의 아우는 곧 나의 아우이니, 내 어찌 나의 말을 아끼겠는가. 대사는 이미 형을 등지고 이단(異端)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형의 벗을 존경할 줄 알고, 또 글을 구하여 우리 유도[儒]를 사모하니, 내 어찌 나의 말을 아끼리오? 그러나 대사의 학문은 우리의 학문이 아니요, 나의 학문은 대사의 학문이 아니니, 길에서 얻어 듣고 길에서 말해 버리는 경박한 행위에 가깝지 않은가.” 하였다.
반고(盤古)씨는 너무나 멀다. 대우씨(大禹氏)가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였으니 사람은 평탄한 땅을 얻어 살고, 높은 바위 산은 그윽하고 깊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드물게 이르는 곳은, 호랑(虎狼) 원조(猿鳥)가 집을 삼아 깃들이는 바 되었다. 그러나 산과 못이 서로 기운을 통하여 때로는 구름과 비를 내고 밭과 논에 물을 대게 하니, 황제(黃帝)가 정전법을 실시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이익됨이 넓다. 배불리 먹고 편히 살면서 그 유래한 바를 알지 못하는 자는 망령된 사람일 따름이다. 내 후생과 더불어 항상 말하여 왔으나, 내 말을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더니, 홀로 긍상인(亘上人)만은 명(名)으로 말미암아 실(實)을 세운 것 같기 때문이다. 상인이 그 스스로 명명한 의의를 구하는 까닭은, 혜택을 삼도(三塗)에 흡족히 적시고, 도를 삼제(三際)에 행하는 것으로써 마음하여 고금이 없이 포함 병합하고, 고하가 없이 평등하게 하여, 반드시 깨달은 성품으로 하여금 시방에 가득히 차게 하고, 두루 청정(淸淨)하게 하면, 예와 현재와 바위와 평지가 모두 내 마음 사이의 전체 묘용(全體妙用)이 될 것이다. 벽을 대해 앉으니 쌓아 얻은 시방공허(十方空虛)가 모두 소멸하려 한다. 어찌 세로 다하고, 가로 뻗치는 이상이 있으리오.
상인은 이미 자신의 본연한 형체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차마 그 이름을 감추지 못하니, 세상 교화에 막연히 무관심한 자는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황제와 대우씨의 일을 끌어서 그의 일단을 발론하고 그의 교(敎)로써 종결하니, 상인은 그 스스로 택할지어다. 상인의 사는 바는 누구의 힘이며, 상인의 먹는 바는 누구의 힘이던가. 동년의 아우라, 감히 정의로써 고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