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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엄곡기(嚴谷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9:04

기(記)
 
 
엄곡기(嚴谷記)
 

비구니 화엄곡(華嚴谷)이 그가 사는 곳에 ‘엄곡(嚴谷)’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초선사(超禪師) 무학(無學)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기문으로 하려고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내가 들으니, 화엄종은 원만한 교법(敎法)으로 온갖 덕(德)을 갖추어서 한 종파를 열었다고 한다. 넓은 것도 가냘픈 것도, 큰 것도 미세한 것도, 트인 것, 막힌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유성(有性)ㆍ무성(無性)과 유형ㆍ무형과 번뇌와 해탈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로 돌아가서 터럭만한 작은 차이도 없다고 한다. 하물며 남녀상(男女相)의 차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학설은 나는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니 우선 일상사로 말하겠다. 일어나고 앉는 것이 때가 있고, 음식에 절제가 있는 것은 일상생활의 근엄이요, 참화(參話 화두에 참여하는 것)에 법도가 있고, 축성(祝聖)에 규범이 있는 것은 안과 밖에 있어서의 근엄이며, 여러 사람이 모여 있거나 홀로 행하거나 오로지 몸을 정결하게 가질 것을 마음먹고 조금도 해이하지 않는 것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근엄이다. 적어도 이 세 가지에서 하나도 폐하는 것이 없다면 도(道)에 가까울 것이다.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열 눈이 보고 열 손가락이 가리키니, 엄하도다.” 하였다. 대체로 마음을 잡아서 반성하여 살피는 것을 엄밀하게 하라는 것이다. 즉 이른바 단속한다는 것이다. 엄곡(嚴谷)은 부인이다. 내가 가까이 하거나 또 가르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나옹(懶翁)이 좋다고 하여 화두(話頭)에 참여할 것을 지시하였으니, 모든 복(福)이 장엄하게 오는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화엄종의 53종의 참례인들이 이 밖에 있는 것인가. 이것을 기문으로 삼는다.


[주D-001]축성(祝聖) : 국왕의 장수(長壽)를 비는 선종(禪宗)의 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