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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익재 선생 난고 서(益齋先生亂藁序)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4. 21. 19:17

서(序)
 
 
익재 선생 난고 서(益齋先生亂藁序)
 

이색(李穡)

원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사해(四海)를 통일하니, 삼광(三光) 오악(五嶽)의 기운이 함께 뭉치어 넓고 크게 움직이고 뻗치어, 중원과 변방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 세상을 주름잡는 재주가 그 사이에 섞여나서 무르익고 성한 것에 젖어들어 그 정수를 취하여 문장으로 펼쳐내어, 일대의 정치를 빛나게 장식하였으니 거룩하다 이르겠다. 고려 익재 선생은 이때에 나서 나이가 20이 되기 전에 문장이 벌써 당세에 유명하여 크게 충선왕(忠宣王)이 중히 여긴 바 되고, 시종(侍從)으로 연곡(輦穀)의 아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대유(大儒) 진신(搢紳) 선생으로 목암(牧菴) 요공(姚公)ㆍ염공(閻公) 자정(子靜)ㆍ조공(趙公) 자앙(子昻)ㆍ원공(元公) 복초(復初)ㆍ장공(張公) 양호(養浩)가 모두 왕의 문하에 종유하므로, 선생은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게 되어, 보는 것이 바꾸어지고 듣는 것이 새로워져 격려(激勵)되고 변화되어, 진실로 고명하고 정대한 학문을 궁극하였다. 또 사명을 받들어 천촉(川蜀)에 가고, 왕을 모시고 오회(吳會)를 구경하여 만여리를 오가는 동안에, 웅장한 산하와 특수한 풍속과 옛 성현의 유적과, 무릇 굉장하고 기절한 구경이 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일괄(一括)하여 남겨둠이 없었으니, 그 통활하고 호방한 기운은 거의 사마자장(司馬子長)보다 못하지 않았다. 만약 선생으로 하여금 이름을 왕관(王官)에 올리고 제제(帝制)를 관장하며 대각(臺閣)에 오래도록 계시게 하였다면 공업의 성취가 결코 요(姚)ㆍ조(趙) 여러 군자에게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취를 거두고 동으로 돌아와 다섯 임금을 모셔 네 번이나 총재(?宰)가 되었으니, 동국 백성에게 있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문(斯文)에 있어서는 어찌하랴. 비록 그러하나 동쪽 사람이 우러르기를 태산과 같이하며, 학문하는 선비가 그 누습을 버리고 차츰 정성(正聲)으로 돌아오게 된 것은 다 선생의 교화였다. 옛 사람으로서 비록 이름이 왕관(王官)에 오르지 못하였으나 교화가 각각 그 나라에 시행되어 남은 바람이 후세에 떨친 이가 있으니, 저 숙향(叔向)ㆍ자산(子産)같은 이를 어찌 적게 여길 수 있으랴. 천자를 보필하여 천하에 호령하는 것은 어느 누가 사모하지 않겠는가만 이름을 전하고 못 전하는 것은 그에 있지 아니하고 이에 있으니, 무엇을 한탄하리오.
선생의 저술이 매우 많았는데 일찍이 말씀하기를, “선친 동암(東菴) 공께서도 아직 문집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소자(小子)이랴.” 하였다. 그러므로 시ㆍ문에 있어, 지으면 곧 버렸는데 남들이 소장하였다. 선생의 막내아들 대부소경(大府少卿) 창로(彰路)와, 장손(長孫) 내서사인(內書舍人) 보림(寶林)이 서로 수집하여 몇 권을 만들어 목판에 새기기로 의논하고 나에게 서문을 명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선생께서 편찬하신 국사(國史)도 오히려 병란에 분실됨을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편언척자(片言隻字)로 남에게 수장된 것이야 소실될 것을 어찌 의심하랴. 이 몇 권만이라도 불가불 빨리 간행되어야 하겠다. 그대들은 아무쪼록 노력하라. 아, 나야 어찌 문장을 아는 자겠는가만 부자(父子)가 선생의 문생이 되었기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짐짓 소견을 기록하는 바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