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序)
설곡시고 서(雪谷詩藁序)
하늘이 나의 기호(嗜好)에 후한 것이 어찌 그리 많은가. 지난해 중국 서울에 있을 적에 한 마을 사람 오현윤(吳縣尹)의 집에 당(唐)의 백가시(百家詩)가 있으므로, 그 절반을 빌려서 한 번 내려 읽고, 간혹 또 당세의 이름 높고 재주 있는 경대부의 가집(家集)을 얻어서 읽었는데, 비록 깊고 얕음을 채 알지 못했지만 충분히 스스로 즐길 수 있었다. 동으로 돌아올 적에 당시(唐詩) 십여 질을 행장에 넣어 가지고 와서, 한산(韓山)에서 은거하는 즐거움에 이바지하려 하였다. 그런데 실력 없는 몸이 주상의 지우(知遇)를 입어 직무를 맡게 되니, 능히 음영(吟詠)의 일에 전심을 못해서 스스로 서글프게 생각하였고, 또 전배의 저술을 많이 보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하물며 지금 난리 뒤에 다시 이 일에 뜻을 둘 수 있으랴.
그러나 《급암유고(及菴遺稿)》와 《익재문집(益齋文集)》은 대개 한번 읽을 기회를 얻음으로써 남으로 온 이래 불편한 기분을 상쾌하게 씻었으니, 어찌 천행이 아니랴. 동년(同年) 정공권(鄭公權) 보(父)가 자기 선친 간의공(諫議公)의 소작을 기록하여 이름을 《설곡시고(雪谷詩藁)》라 하였는데, 모두 두 권이다. 나에게 주며 그 머리에 서문을 쓰라는 것이다. 내가 설곡의 시를 보니 맑아도 고고(苦孤)하지 않고, 화려해도 음탕하지 아니하여, 사기(辭氣)가 우아하고 심원하여 결코 저속한 글자는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득의작을 보면 왕왕 내가 중국에서 보던 경대부(卿大夫)와 더불어 서로 대등하였으며, 동시에 당(唐)의 요(姚)ㆍ설(薛) 제공의 틈에 끼어도 부끄럽지 아니하다. 아, 천하의 갑작스런 난리로써 신축년 중동(仲冬)에 있었던 난리보다 참혹한 것이 어디 있으랴.
이때를 당하여 사람이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어진 자나, 불초한 자를 막론하고, 자기 집 소유물이 아무리 긴요한 것이라도 잠깐 사이에 없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으며, 죽고 사는 일에 관계된 것이라도 버리고 가서 난색을 보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간수하기 힘들고 버리기 쉬운 이 묵은 종이 뭉치야 말해 무엇 하랴. 그 자식된 도리를 생각하면 진실로 차마 못할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공권(公權)이 아니면 나는 감히 보증을 못하며 또 하늘이 나의 기호(嗜好)에 대해 후히 하지 않았다면 난들 어떻게 상란(喪亂)과 파천(播遷)을 겪은 뒤에 이런 즐거운 일을 얻어서 실컷 그 가운데서 헤엄치고 읊조리며 평소의 소원을 이룰 수 있었으랴.
비록 그러나 이것이 어찌 유독 나의 다행만 되겠는가. 다른 날에 사가(史家)가 예문지를 만들 때는 장차 이 시집에서 증빙하게 될 것이며, 혹시 예산(猊山) 농은(農隱)의 동문(東文)을 유선(類選)한 것을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역시 이 시집에서 간추리게 될 것이니, 장차 이 시집으로 하여 더욱 오랠수록 설곡(雪谷)의 이름이 더욱 드러날 것이 아닌가. 이 시집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 공권보 때문이니, 아, 공권보는 아들된 도리를 잘했다고 이를 만하다. 선곡의 이름은 보(?) 자는 중부(仲孚)니, 나의 선친 가정(稼亭) 공과 더불어 서로 좋은 사이였고, 나도 또한 공권보를 매우 사랑하는 처지이며, 선업(先業)을 없어지지 않게 하려는 그 뜻도 또한 같으므로 즐거이 서문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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