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부훤당기(負暄堂記)
설악상인(雪嶽上人)은 나옹(懶翁)의 제자이다. 스승의 석장(錫杖)의 신광(神光)이 원적(圓寂)ㆍ노골(露骨)ㆍ청평(淸平)ㆍ오대(五臺)로 옮겨 송광(松廣)에 머무르고, 송광으로부터 회암(檜巖), 회암에서 서운(瑞雲) 길상(吉祥) 등 여러 산을 거친 뒤에 다시 회암에 머물렀었다. 상인이 모두 따라가서 조석으로 감화받아 자못 얻은 바 있었으니, 그 하룻밤에 깨달은 것과는 비록 다르다 하겠으나, 날로 쓰면서도 알지 못하는 자가 감히 바라볼 바는 아니다. 나에게 그 집을 이름해 주기를 구한다.
나의 □□□ 신륵상인(神勒上人)이 군중 속에서 그 외모가 빼어 나고도 진중함을 보았고,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사리에 합당함을 듣고서는 내 마음에 기이하게 여겼기 때문에, 다시 사양하지 않고 이에 부훤(負暄)으로써 말막음을 하여 고하기를, “대사의 스승이 대사를 설악으로 호(號)를 한 것은 아마, ‘일천 산에 새 날아 끊어지고, 일만 산길에 사람의 자취 사라졌다.[天山鳥飛絶 萬徑人縱滅]’는 그 기상을 취했을 것이다. 한 점의 티끌도 날지 않고, 전체를 홀로 드러내어 멀리 구름 밖에 솟아 있으니, 음양(陰陽)과 한서(寒暑)가 가히 침범하고 녹일 바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나 핏기가 있고 생명이 있는 바에 담담한 밥으로 그 배를 채우고, 거친 옷으로 그 몸을 가리는 것은 비록 세속의 학문을 끊고 아무 근심없는 경지에 도달한 자일지라도 또한 면하지 못하는 바이다.
내 상상하건대 설악상인이 겨우살이에 방안의 병물이 얼고, 화롯불이 꺼지며, 샘물이 얼어붙어 맵도록 추울 것이다. 그러다가 아침해가 높은 산봉우리에 나와 짧은 처마에 들어오면 따스함은 가히 친할 만할 것이다. 그 햇살을 등지고 눈을 감으면 기운이 오르고 정신이 융화하여 비록 향기로운 장막을 치고 숯불에 고기 구워 먹는 깊은 규중(閨中)의 더운 기운일지라도 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집에 편제(扁題)하는 것이 헛된 미사(美辭)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대저 가장 높은 도(道)는 형체가 없고 만물로 인하여 볼 수 있는 것이요, 만물이 나와 더불어 또한 둘이 아닌 것이다. 눈이 오면 차고 볕이 나면 따뜻하며, 따뜻한 기운엔 피어나게 되고, 찬 기운엔 움츠리는 것은 홀로 내 몸뿐이 아니요, 천지의 도(道)이나, 지묘(至妙)한 이치가 그 사이에 있으니, 마음에 있을 따름이다. 사람 몸에 자리잡고 있는 마음의 작음이 비록 사방 한 치[一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가장 높은 도가 존재한 바이기 때문에, 한열(寒熱)로 인하여 짐짓 조금이라도 변함이 없어 당당(堂堂)한 도의 전체가 하늘도 덮고 땅도 덮는 것이다.
상인이 고요히 앉아 구하는 바가 바로 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열에 찬 두뇌가 더욱 심하다. 대사와 더불어 차를 달여 마실 날은 어느 날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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