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육익정기(六益亭記)
상락(上落) 김직지(金直之)는 나와 같은 해에 진사가 되었다. 나이가 나보다 4살이 위인데 서로 매우 좋아하여 날로 상종하면서도 차마 떨어지지 못하여 밤에도 같이 자면서 등불을 돋우고 시를 읊었다. 직지의 부모도 또한 그가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기뻐하여 후히 술과 음식으로 우리를 먹이니 나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다.
나는 요행히 빠르게 재부(宰府)에 올라 2번이나 과거를 맡아보았으나 직지는 아직도 여러 유생에 끼어 고시장을 출입하고 있었다. 매양 응시 유생의 고열(考閱)이 끝나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직지가 이번엔 또 어찌 되었는가.” 하다가, 방이 나옴에 미쳐서는 직지의 낙제를 스스로 마음 아파했으니, 비록 직지 자신의 아픈 마음일지라도 또한 어찌 나보다 더하리오, 이로 말미암아 마음으로만 공평한 것이 법에 공평함만 같지 못함을 알았다. 직지가 시율(詩律)에 능하더니 다행히도 이제 시부(試賦)로써 선비를 취택하게 되었는데 직지가 또 외간(外艱 부친상)을 당하여 응시함을 얻지 못한 것이 2번이나 되니 아, 슬프도다.
그러나 직지의 마음이 오히려 마지 않아서 세상에 뜻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마음에 번민하게 되나니,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법을 구하려면 들과 산에 자적(自適)하며 아침저녁으로 스스로 마음을 기름만 같지 못하다 하여, 이에 상주(尙州)의 속현 청려(靑驪)란 땅을 택하여 집을 짓고 살며 진(晉)나라 처사(處士) 도정절(陶靖節 도잠)의 송(松)ㆍ죽(竹)ㆍ국(菊)의 3가지 유익한 벗이란 말을 취하고, 뽕ㆍ밤ㆍ버드나무를 더 심고는 스스로 그 정자를 이름하기를 육익(六益)이라 하고, 나의 기를 구해 왔다.
나는 쓰기를, 손(損)과 익(益)의 상(象)이 《주역(周易)》의 괘(卦)에 밝혀 있으니 말할 필요가 없고, 유해하고 유익한 벗은 《논어(論語)》에 상세히 있으니 역시 말할 필요가 없다. 직지가 시를 읊기를 좋아하여 시의 비(比)와 흥(興)에 그 얻은 바가 아마 깊을 것이니, 내 또한 어찌 감히 군말을 하리오. 그러나 이 정자에 오르는 빈객들이 모두 직지의 심정과 정자를 이름한 의의를 반드시 알리라고는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직지의 이 여섯 가지 식물에 대하여 정성스럽게 아끼고 받드는 바를 대략 기록하여 고하노라.
소나무는 심(心)이 있고, 대나무는 포(苞)가 있어 네 계절을 통하여 가지와 잎을 바꾸지 않으니 군자가 취하는 바이고, 국화가 세상을 피하여 숨은 모습은 은거하는 자의 취하는 바이고, 뽕나무를 빈아(?雅)에 기록한 것은 의상(衣裳)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요, 밤나무를 초구(楚丘)에 기록한 것은 제사에 소용되기 때문이며, 버드나무란 물건은 때를 따라 사람에게 감동을 주며, 그 사(私)를 버리고 공에 봉사하고 수용에 공급하며 구하여 얻기에 쉬운 나무이다. 직지가 그 가운데 살면서 한서(寒暑)의 움직임으로 미루어서 시물(時物)의 변화를 보고, 느낌에 따라 마음에 응하여 시와 노래를 읊어 무형의 형체 속으로 들어가고, 무미(無味)한 맛 속에서 맛을 씹으니 사시의 경치가 같지 않고 즐거움도 또한 무궁할 것이다.
직지가 비록 세상에 뜻을 얻지 못하였으나 그 몸에 스스로 얻은 바가 이와 같으니, 아, 이것은 이[齒]를 준 자에게는 뿔[角]을 제거함이니, 조물주가 참으로 사람에게 주는 것을 아끼는 도다.
내가 이제 우환으로 인하여 곤핍 속에 싸인 지 9년의 장구한 세월에 이르니, 이는 바로 내 연한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다. 직지는 불우한 속에 늙었으니 마땅히 그 마음속을 즐기고, 몸을 편하게 함을 얻어 영리에 분주하다가 최절(?折)되고 퇴패한 동배[同年]들이 선망하는 바가 된 것이다. 그 여섯 가지 유익이라는 것은 그 덕을 더함이던가, 그 수(壽)를 더함이런가. 직지는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로다. 기미년 4월 22일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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