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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소재기(疎齋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8:31

기(記)
 
 
소재기(疎齋記)
 

인산(仁山) 최언보(崔彦父)가 새로 삼전동(三殿洞) 동쪽 봉우리에 집을 지을 제 벽을 바르고 지붕도 덮어 장차 공역을 마치게 되었다. 고개를 넘고 숲을 헤치며 골짜기의 외로운 버드나무 아래로 찾아와 목은자(牧隱子)에게 이름을 묻기를, “나는 재능도 없고, 또 병이 많아 능히 추세하고 아첨하지 못하여 내 몸을 붙일 곳이 없으나, 정유년에 과거에 오른 이후 22년이 된다. 서기(書記)를 맡음으로부터 삼관(三館)의 관직에 보직되었고 여러번 전전하여 이제 예의사 총랑(禮儀司憁郞)으로 봉상(奉常)의 계급에 이르도록 일찍이 하루도 관직에서 떠난 일이 없어, 해마다 나라의 녹을 소모해 왔음은 당국자의 아는 바 아님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지 오래이나 벼슬이 4품을 벗어나지 못함은 나의 운명이며 나의 소활한 탓이다. 명을 하늘에서 받은 것을 원망함이 아니요, 사람들이 나를 소외함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소외하게 하고 멀리함이니 어찌 남을 원망하겠는가. 또 근일에 뛰어난 인재와 학자들이 많이 화패(禍敗)를 겪는 것으로 보면, 나의 소활함을 일찍이 마음속으로 달게 받고 자족하게 알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감히 불만스러운 뜻을 잠시나마 두었으리오. 내 장차 내 집에 편액하기를 성길 소(疎) 자로 할 것이니, 그대는 원하건대 이를 기록하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소활한 것은 내가 일찍이 시험한 바이다. 학문의 소활로 추잡하고 경박하니 내 비록 뉘우치고 있지만 미치겠는가. 사무에 소활하여 벼슬자리를 비우고 직무를 폐하였다. 내 비록 뉘우치나 추급하겠는가. 교우(交友)의 소활로 옛 벗에게 버림받고, 오다가다 만난 사람에게도 시기를 받으니 내 비록 뉘우치나 미치겠는가. 군신간에 기밀을 비밀히 하지 않아 해를 이루어 위험한 지경에 빠질 뻔한 것이 또한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윗사람을 섬기는 데 소활함을 내 비록 뉘우치나 미치겠는가. 무릇 이 4가지 중 하나만 자신에게 있어도 족히 세상에서 버림받거늘 하물며 4가지를 아울러 가지고 있음에랴.
이는 마땅히 폐출되어야 하는데도 양부(兩府)에 벼슬하고, 2번 문형을 지냈으며,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임금의 녹을 봉해 받아 먹은 것이 또한 장차 5년이나 되니, 소활이란 사람에게 이익됨이 크다. 내가 시험한 바는 이에 그치거니와 이제 그대가 그 집의 문 위에 써서 달면, 그대의 소활한 것이 다른 날에 나의 소활했던 것같이 되지 않을 것을 어찌 알리오.
학문에 더욱 면려하고 직무에 더욱 근면하며, 교제에 더욱 신의 있게 하면 임금에게 은우(恩遇)하기는 비록 늦더라도, 마땅히 본래 온축(蘊蓄)된 것을 펴기를 반드시 내가 세운 사업과 공로보다 멀리 지날 것이니, 그 소활에서 거두는 공효가 반드시 영쇄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하늘의 복으로 두 늙은이가 서로 제휴하여, 푸른 들과 집에서 부르면 수답(酬答)하고 노래하면 화답하여, 타고난 연한을 마침을 얻는다면 세상의 교칠(膠漆)같이 굳고, 성부(城府)같이 깊었다가 마침내 패로(敗露)되어 해산하는 자들이 그 소재(疎齋)를 부러워함이 어떠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