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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포은재기(圃隱齋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8:28

기(記)
 
 
포은재기(圃隱齋記)
 

내가 《노론(魯論 지금 전하여 오는 논어》을 읽을 때 번지(樊遲 공자의 제자)가 채소 가꾸는 법 배우기를 청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내 원예에 대해서는 늙은 사람 원예사만 못하다.” 한 데에 이르러 나는 생각하기를, 번지가 성인을 좇아 배운 지 오래이거늘,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을 묻지 않고 이에 급급하였던 것은 과연 무슨 뜻에서였던가. 성인의 뜻은 일찍이 천하를 잊어버리지 않았던 것을 번지는 미처 알지 못하였던가.
성인이 비록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젊어서 신분이 천하였기 때문에 많이 비루한 사람의 일에 능했었다.” 하였다. 그러나 위리(委吏 창고의 양곡 출납을 맡아보는 직책)와 승전(乘田 육축〈六畜〉의 목축을 맡은 관원)은 모두 관직에 있는 자이다. 그 관직에 있으면 그 직책을 다해야 하는 것이니, 그 직책을 다하는 것은 홀로 성인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릇 군자된 자와 함께 말미암은 바이다. 장저(長沮)ㆍ걸익(桀溺)이 짝지어 밭갈 때의 대답이 불손했었다. 공자가 책하여 말하기를, “새와 짐승과는 벗하여 상종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이 뜻을 천하게 둠이 가히 지극하다고 하겠다. 늘그막에 불우하여 시서예악(詩書禮樂)을 산정ㆍ편수하여 그의 가르침을 만세에 드리웠으니 농사나 원예같은 것도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 듣지 못하였다 하시었으니, 그런즉 번지의 질문은 스스로 낮춘 것일 뿐 아니라, 또한 족히 성인을 알지 못하였음이 자명하다. 비록 그러하나 성인은 하늘같이 자처하여 그 천하를 보기를 할 수 없다고 보는 때가 없기 때문에, 공산(公山)의 부름에도 또한 배척하지 않았고, 양화(陽貨)의 예물[禮]도 또한 경솔히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천 년이 지난 뒤까지도 오히려 그 마음의 고충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으니, 그 번지의 물음을 비루하다 함도 당연한 일이다. 번지에 이르러서는 그의 자처함이 감히 안자(顔子 공자의 제자〈弟子高第〉 안연〈顔淵〉)를 바라보지 못했을 것인데, 안자도 오히려 협착한 집에 있었으니 벼슬을 구하는 길을 배우지 않고, 원예를 배우려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랴.
중유(仲由 공자의 제자)와 염구(?求 공자의 제자)도 공자에게 문책을 당하여 심지어 북을 울리며 공격하려고까지 하였으니, 번지가 친히 공자의 노기가 얼굴에 나타남을 보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이르기를, “중유 염구는 나와 동렬(同列)에 있는 우수한 사람인데도 이와 같은데 더구나 나의 무리이랴. 나아가 벼슬하지 않으면 은거해야 할 것이요, 은거하지 않으면 나아가 벼슬해야 할 것인데, 은퇴하여 나의 몸을 마칠 땅을 구한다면 원예에 종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여 그 원예를 다스리는 원리를 물은 것으로써 마음속의 고충이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가 선생님을 앞에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며 자신의 열등을 한탄하고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하여 물은 그 모양을 또 상상할 수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거룩하다, 그 인재가 많음이여, 문왕이 이로써 편히 누리었도다.” 하였으니, 주(周)의 다스림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성인의 문하에 우수한 자가 70명이요, 감화받은 자가 3천 명이나 되며 원예를 배우는 질문이 그 사이에서 나왔으니, 어찌 더욱 슬프지 않으랴. 오천(烏川 연일〈延日〉) 정달가(鄭達可 정몽주)가 〈녹명(鹿鳴 시경의 편 이름)〉을 노래하니 향리의 예물이 크게 이르고, 장원(壯元)에 발탁되니 문단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유도(儒道)의 전통을 염락(濂洛) 의 연원(淵源)에 계속하였고, 모든 유생을 시서(詩書)의 광장으로 이끌어 넣었으며, 더욱이 시(詩)를 잘한다는 것으로써 당세의 칭송을 받았다. 나라의 폐백을 받들어 금릉(金陵 중국의 서울)에 간 바 있고, 배를 띄워 일본에 사절로 간 바 있으니, 사명 수행의 재능은 평소의 말한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봄에 버들가지를 꺾어 채소밭의 울타리를 하니, 주야의 한도로 인하여 천도(天道)에 영구성이 있는 데 통하였고, 10월에 채소밭에 마당을 닦으니 한서(寒暑)의 운행으로 인하여 민사(民事)에 차례가 있음을 알았다. 아래로 민사를 닦고, 위로 천도에 순응하면 학문의 지극한 공효와 성인의 가장 능한 일을 다하는 것이다. 내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이리하여 포은(圃隱)으로 그 집의 이름을 지었노라.” 하고 나의 기문을 구해 왔다. 나는 이르기를, “정전법(井田法)에 2묘(畝)반은 밭에 있다.” 하였으니, 채소밭이 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다만 알 수 없는 일은 그때에도 역시 숨어 산 자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일이다. 소부(巢父) 허유(許由)는 은거한 사람이다. 그런데 식사에 채소는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므로 그들도 채소 농사를 했을 것은 가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이제 달가(達可)는 채소밭에 은거하면서 조정에 서서 유도(儒道)의 융흥을 자임하고, 엄정한 용색(容色)으로 학자의 사표가 되고 있으니, 진정으로 숨은 것이 아님이 명백하다. 소치는 자는 질그릇 굽는 자와 서로 맞서려 하는가. 기미년 봄 2월 경신일 쓰다.


[주D-001]염락(濂洛) : 송(宋)의 명유(名儒) 염계(濂溪) 주돈이(周敦이)와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程?) 형제를 가리킨다.
[주D-002]소치는 자 : 목은(牧隱) 자신을 가리킨다.
[주D-003]질그릇 굽는 자 :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