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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축은재기(築隱齋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8:27

기(記)
 
 
축은재기(築隱齋記)
 

문생 송문귀(宋文貴)가 이름 자의 귀(貴) 자를 고쳐 중(中) 자로 하였는데 자(字)는 일창(日彰)이다. 판축(版築)의 축 자를 따서 그가 사는 집을 이름하여 ‘축은(築隱)’이라 이르고, 나에게 기문을 구하여 말하기를 “문중이 젊을 때에 부모가 매우 사랑하였다. 매우 사랑한다면 그 몸으로 하여금 세상에 현달하게 하고자 하였을 것이니 그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릇 세상에 현달하는 길이 세 가지가 있으니, 유학[儒]과 관리[吏]와 무관[武] 등이 있는데, 나의 기질이 유학에 가까운 까닭에 문귀라 이름하였던 것이다.
아, 부모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그에 대한 생각을 깊이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중이 혼자서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마다 자신이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으니, 천작(天爵 사람에게 갖추어진 자연의 미덕)이 곧 그것이다. 천작을 닦아 인작(人爵 사람이 정한 관위(官位))이 따르는 것은 사군자의 크게 욕망하는 바이나, 곧장 인작을 구하고 천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우리 유학자의 일은 아니다. 천작이란 인ㆍ의ㆍ충ㆍ신과 착한 일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니 인ㆍ의ㆍ충ㆍ신과 착한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인 중도(中道)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 자로 고친 것이니, 중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각기 분립하는 바 되는 것으로써 그 귀함이 비할 데 없으니 부모가 명명(命名)한 뜻에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고, 내가 힘써야 할 바에 대해서도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으니, 하분(河汾)에서 학도를 모아 학문을 강의한 문중자(文中子)를 사모하여 하는 것은 아니다. 원하건대 아울러 이를 기록해 달라.”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중에 대한 뜻풀이는 《중용(中庸)》에 풀어 있다. 다시 무슨 말을 늘어놓으랴. 그러나 일창이 이미 중 자로써 스스로 명명하고, 그 사는 집을 축은이라 이름하니 내 이로 보아 일창은 뜻있는 사람임을 알았노라. 중(中)의 용(用)은 말할 때, 고요할 때, 나아갈 때, 물러날 때에 항시 드러나 보이며, 그 체(體)는 높아서 가히 따라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에 집을 짓고 스스로 거함에 집안이 온통 소연하니 일창의 중용의 도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띠로 지붕을 덮고 흙으로 뜰을 쌓은 것은 상고의 성인이 그 중용을 쓴 것이요, 주옥으로 정자와 궁실을 호화찬란하게 장식함은 후세 사람이 그 중용을 잃은 것이니, 일창의 중용지도를 내 더욱 사모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대부가 그 뜻을 얻어 처신함에 있어, 그 거처를 화려하게 하고 그 음식을 풍족하게 하여, 안으로는 그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밖으로는 그의 영달을 과시하면서도 날로 부족하게 여기나, 요행히 아들에게 전하고 또 요행히 손자에게 전하는 자는 아마 몇 사람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자리가 따뜻해지기도 전에 집을 옮기고, 벽도 마르기 전에 주인이 바뀌는 수도 있으니, 축은의 집은 이런 유가 아님이 명백하다. 그러나 다만 깨진 독 아가리로 창(窓)을 내었던가, 문 옆에 홀[圭] 모양의 좁은 문을 내었던가, 노끈[繩]으로 문 지도리를 대용하였던가, 가시덤불로 사립을 했던가, 움집같이 되었던가, 토실(土室)같던가, 위로 비가 새던가, 옆으로 바람이 들어오던가는 알지 못하나, 하나 단정할 수 있는 것은 담소하는 자리에 당대의 석학들이 있을 것이요, 왕래하는 손님에는 이름 없는 백도(白徒)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일창이 그 가운데 편히 살면서 반드시 사모하는 바 있을 것이니, 그렇다면 부암(傅巖)땅의 부열(傅說)이 아니겠는가? 고종(高宗)이 꿈을 꾸고 않는 것은 또 하늘에 있는 것이니, 일창은 오직 중(中)의 도(道)만을 굳게 잡는다면 평생을 축은재에서 마친대도 미워할 바 아니요, 그 모형을 그려 널리 천하에 구한다 해도 또한 원할 바 아닐 것이니, 중의 도란 사람에게 있는 것인가, 하늘에 있는 것인가? 착한 자는 복을 받고, 어지럽게 하는 자는 화를 입는 것은 그 유래가 명백하니, 천도(天道)는 스스로 어김이 없는 것이다. 일창은 그것을 더욱 힘쓸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