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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각암기(覺菴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8:40

기(記)
 
 
각암기(覺菴記)
 

석씨(釋氏) 지선(志先)이 그 사는 집을 각암(覺菴)이라 편액하여 붙이고, 목은자(牧隱子)를 쫓아와 기문을 구한 바 있다. 내 허락하고도 오래도록 써주지 않은 것은 아낌이 아니요, 겨를이 없던 것인데, 그 구함이 또 간절하니, 간략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맹자》에, “천민(天民)으로 선각(先覺)한 자 이윤(伊尹)의 말을 기술하며 이윤의 뜻을 뜻한다.” 하였으니, 이것으로 스스로 표함이 마땅하지만 이제 지선은 석씨이다. 무엇을 취하였음인가.
은(殷) 나라의 위는 하(夏) 나라요, 아래는 주(周) 나라인데, 주 나라가 쇠퇴하면서부터 석씨의 교가 비롯한 것이다. 이윤의 뜻은 한 지아비와 한 지어미라도 요순(堯舜)의 덕을 입지 못한 자 있으면 자기 몸을 밀어서 개천 속에 집어넣는 것같이 생각하였으니, 그 천하로써 자임(自任)함이 극진하다.
그 풍화를 온 중국에 입히고, 서역까지 미쳤으니 석씨가 홀로 이 뜻[志]을 얻어 이를 이루고 또 키워서 이르기를, “삼계(三界) 삼세(三世)에 꿈틀거리는 자는 모두 나의 분신이다. 내 마땅히 그 빠진 자를 건져주고, 그 주린 자를 밥 먹이리라.” 하고, 수다스럽게 입술을 놀리고, 쉬지 않고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면서 잠시도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이윤의 뜻과 같은 것이다.
다만 그 관면(冠冕)의 예복을 찢어 없애고 부자(父子)의 은혜를 버리고 금수와 더불어 한 무리가 되는 것이 다르다. 우리 유가에서 혹 비난하는 것이 과한 일도 아니나, 세상 교화가 옛날과 같지 않아서 인륜이 무너지고 상패함을 석씨에게서 비방과 웃음을 사는 적이 적지 않다. 석씨는 독선(獨善)에 가까우나 그 기풍이 오히려 족히 쇠퇴한 세상을 격동하게 할 것이니, 내 이를 취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때로 서로 왕래하거니와, 더불어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비니, 그 뜻은 가히 가상한 일이로다.
이제 지선은 또 그 무리 중의 뜻있는 자이다. 원근의 거리를 가는 데 구속을 받지 않으며, 사람과 더불어 계교하지 않고, 혜택을 만물에게 미치게 하는 것을 선무로 삼으니, 대개 이른바 쇠 가운데의 쟁쟁(錚錚 강하고 예리함을 말함)한 자이다. 비록 그러나 사람을 헤아림에 반드시 그 무리를 통하여 본다 하였으니, 나의 이 죄를 진실로 피할 바 없음을 안다.
그러나 듣는 이의 귀에 순하게 하여 아첨하는 데 비하면 거리가 있을 것이니 나의 죄도 마땅히 말감(末減)될 것이다. 만약 그의 논설에 의하면 불(佛)이란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나, 나는 오히려 이에 자세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