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은선생글 ▒

기(記) 지평현 미지산 용문사 대장전기(砥平縣彌智山龍門寺大藏殿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8:21

기(記)
 
 
지평현 미지산 용문사 대장전기(砥平縣彌智山龍門寺大藏殿記)
 

《대장경(大藏經)》 한 질은 모관(某官) 모(某)의 시주에 의한 것이다. 처음에 강화부(江華府) 용장사(龍臧寺)에 두었었는데, 이것은 불의의 변을 피하려 함에서이다.
경인년부터 왜인이 바닷가의 군과 읍을 범하기 시작했는데, 강화는 요충 지대이므로 더욱 많이 그 해를 입었다. 구씨 손녀도 죽고 만호 벼슬을 한 인당(印?)의 부인도 죽었다. 재신(宰臣 고을 사는 사람) 오자순(吳子淳)의 부인이 일을 도모하여 말하기를, “우리 할아버지께서 불법에 귀의하시어 《대장경》을 시주하였던 것인데, 불행하게도 왜적에게 짓밟혀 거의 절반이나 잃어버렸으니, 어찌 보정(補正)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두겠는가.” 하여 경천사(敬天寺)로 옮기어 제목을 쓰고 함에 넣어놓으니 헌 책이 온전히 되어 새 책과 같았다. 그런즉 또 말하기를, “이 절은 또 물에 가깝고 용장사와의 거리가 한 칸밖에 안 된다. 깊은 산중 밀림이 우거진 골짜기에 옮겨서 보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마침 미지산(彌智山)의 지천(智泉) 등이 《대장경》을 서울에서 시주받으려 다닌다는 말을 듣고, 구씨(具氏)가 기뻐서 따라가 그 연고를 일러주니 지천 등이 큰 보배 얻은 것을 즐겁게 여겼다. 이때에 지천 등은 하는 것 없이 소망을 이루었고 《대장경》은 돌아갈 곳을 얻게 되었으니, 시주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둘 다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말할 것이요, 용문산에서는 절이 있은 이래 갖추지 못했던 일을 하루아침에 모으게 된 것이요, 구씨의 자손은 비록 백 세(世)가 되더라도 다시 대장경에 대하여 근심이 없게 되었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그 할아버지의 영을 명명한 가운데에 위로함이 된 것인즉, 용문(龍門)ㆍ천룡(天龍) 8부(八部)가 마땅히 대장경을 보호하기를 안목(眼目 사물의 요긴한 곳)을 보호함과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니 구씨는 후손 노릇을 잘했다고 말하겠다.
내 본래 석씨(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즐기지 아니하여 천 개의 함과 만 개의 축(軸)에 써 있는 말을 듣고 처음에 그 수가 많은 것을 괴이하게 여겼다. 그 제목을 들어봄에 경(經)이라 율(律)이라 논(論)이라 하였는데, 경은 불어(佛語)와 보살어(菩薩語)를 논함이요, 율(律)은 그 예의를 드러냄이며, 논은 그 뜻을 부연하였지만 다 석가모니의 금구(金口)에서 나온 것은 아니나, 그 도를 보좌[羽翼]하고 말이 조금 이치에 가까운 것까지도 문득 거둬넣었으니, 천함(千函)과 만 축의 많음에 도달하는 것이 옳겠다. 그 학문을 배움이 있는 자 그 글을 눈으로 보고, 그 뜻을 마음으로 찾아 일천 성인이 전하지 못한 묘리를 글자 수에 얽매어 사리가 분명하지 못한 가운데에서 구해 얻게 되면 이것이 바로 그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아니하는 것이다. 만일 손가락 한번 튕기는 짧은 시간에 《대장경》이 벌써 된다면 녹야원(鹿野苑)과 발제하(跋提河 인도의 강 이름) 수십 년간에 사람과 하늘이 둘러 있어 마땅히 무슨 일을 지었다고 보겠는가.
그러나 시냇물 소리가 곧 장광설(長廣舌)이고 속눈썹이 눈앞에 있어도 길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니, 불도를 배우는 자 마땅히 스스로 체(體)를 받고 소홀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대장전(大藏殿)은 무릇 세 칸으로 그 재물을 시주하여 짓는 것을 도운 사람은 북원군부인(北原郡夫人 북원은 원주의 옛 이름) 원씨(元氏)였다. 무오년 가을 8월 모일 쓰다.


[주D-001]녹야원(鹿野苑) : 중인도에 있었던 동산. 석가가 처음으로 다섯 사람의 비구를 위해 설법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