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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환암기(幻菴記)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4. 21. 18:19

기(記)
 
 
환암기(幻菴記)
 

내 아직 나이 20이 되지 못하여 산중에 가 놀기를 기뻐하였다. 그리고 중과 같이 사여게(四如揭) 외는 것을 익히 들었다. 비록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돌아가는 곳을 따지게 되면, 무위(無爲 생멸〈生滅〉이 변화하지 않고 상주〈常住〉하는 것)뿐이다. 꿈을 깨면 그만이고, 환(幻)은 법이 물러가면 비고 거품은 물로 돌아가며 그림자는 그늘에서 꺼진다. 이슬이 마르고 번개가 꺼지는 것도 다 실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실지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실지로 없는 것도 아니지만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석가의 교(敎)가 대체로 이러하다.
좀 자라서 선비 열 여섯 사람과 계(契)를 맺어 좋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천태(天台 불교의 종파명)의 원공(圓公)과 조계(曹溪 불교의 종파명)의 수공(修公)도 참여하였는데, 서로 마음 얻기를 깊게 함과 서로 기약하기를 두터이 함은 더 말해 무엇하랴. 내가 연경(燕京)에 가서 관학(官學)에 다니게 되자 수공(修公)도 산으로 들어갔는데 이제 30년이 되었다. 간혹 서로 만나 자게 되면 그 전일을 회상하게 되는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기세가 등등하였던 것을 어찌 다시 얻으리오. 참으로 꿈같고 참으로 환과 같구나.
현릉(玄陵)이 공의 풍채를 흠모하여 두 번이나 큰 절에 주지가 되라고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비록 강권에 못 이겨 절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버리고 가니, 대체로 세상 보기를 환(幻)같이 본 지가 오래다. 일찍이 일전십원법석(一典十員法席 불도를 닦는 법회)이 있었는데 현릉이 돌아갔는데 공이 환(幻)의 맛을 더욱 몸소 맛보았다. 청룡혜선사(靑龍惠禪師)가 서울에 오자 공이 글을 보내어 나에게 환암기를 써주기를 요구했다는데 그 말은 이러하다. “몸의 환은 사대(四大 불ㆍ물ㆍ바람ㆍ흙)가 그것이요, 마음의 환은 연영(緣影)이 그것이요, 세계의 환은 공화(空華 번뇌가 있는 사람에게 온갖 공상이 나타나는 것을 말함)뿐입니다. 그러나 이미 환이라 하되 그것을 볼 수 있었고 닦을 수 있었습니다. 볼 만한 것을 보았고 닦을 만한 것을 닦았으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내 평생에 처하던 곳이니 어찌 단멸(斷滅)에 들어가겠습니까. 소위 삼관(三觀)이란 것은 한 번 두 번 거듭하여 청정(淸淨)을 이루고, 윤회를 정하여 환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진세의 생각을 없애는 방법이 그 가운데 꿰어 있으니 환 그 자체가 말학(末學)에게 유익한 것이 그리 얕지 아니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내가 거처하는 방 앞에 환암(幻菴)이라고 표시하여 제 풍도를 듣고 제 방에 들어오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음이 있게 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아니하여 고요하고 쓸쓸한 가운데 한가히 있는 경계를 하필이면 이름을 세우고 말을 세워서 쓸데없는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내 본래부터 공을 안 지 오래고 또 공부를 가려 하였기 때문에 오직 공만이 입을 열게 되면 정확하게 묻는 뜻에 대답함을 알고, 그리고 공의 이름이 헛되이 얻어지지 아니한 것이요, 절대적으로 일반보다 뛰어났기 때문인 줄을 알고 있다. 이제 암자에 이름한 뜻을 보니 자리를 위하여 표현함이 아니라, 앞으로 그 문에 와 공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거할 것이 있게 하고, 그들을 위하여 힘을 쓰는 곳이 되게 하려 함에 뜻이 있으므로 글이 옹졸하니 못 쓰겠다고 거절하지 아니하고 썼다.
또 노래를 지어 그에게 보냈는데,
“흰 구름이여 대허를 가고 / 白雲兮行大虛
긴 바람이여 창해를 걷어 마는구나 / 長風兮卷滄海
오기는 어디에서 왔으며 / 其來兮何從
가서는 어디에 또 있는가 / 其去兮安在
암자 가운데 높이 누웠음이여 도인이 한가하고 / 菴中高臥兮閑道人
달이 등불이 되었음이여 소나무는 일산이 되었도다”/ 月作燈兮松作蓋

하고, 다시 고하여 말하기를, “뒤에 내 기(記)를 읽는 자 마땅히 환인(幻人)의 심식(心識)을 배워야 할 것이요, 그런 뒤에야 수공(修公)의 사람됨을 알 것이요, 또 내가 이 기를 지은 뜻을 알 것이니 착안(着眼)을 높이 하기 바란다. 무오년 여름 5월 스무 여샛날 쓴다.” 하였다.


[주D-001]삼관(三觀) : 진리를 달관하는 세 가지 지(智), 곧 천태(天台)의 공관(空觀)ㆍ가시(假視)ㆍ중관(中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