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이개 ▒

홍주(洪州) 성 선생(成先生) 유허비(遺墟碑) -송시열(宋時烈)-

천하한량 2007. 4. 6. 02:34

비(碑)
 
 
홍주(洪州) 성 선생(成先生) 유허비(遺墟碑)
 

선생은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의 명신(名臣)으로, 휘는 삼문(三問)이요 자는 근보(謹甫)이다. 세속에 전하기를,

“선생이 태어날 때에 공중(空中)에서 ‘아이를 낳았느냐.’고 세 번을 물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삼문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선생은 문종(文宗)과 노산(魯山 추시되기 전 단종의 강호)을 역사(歷事)하였는데, 세조 병자년(1456, 세조2)에 단서(丹書)에 걸려서 그 아버지인 휘 승(勝)과 더불어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등과 함께 다 죽으니, 이들이 곧 세속에서 일컫는 육신(六臣)이다. 그때에 죽임이 그 처노(妻?)에게까지 미쳐 도륙(屠戮)되고 멸문(滅門)에 연좌된 자가 또 30여 가문(家門)이 되었으나, 발길을 달리한 자들은 안전한 부귀와 높은 영광이 여러 대 동안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수 백 년이 되었어도, 사람들이 흠선(欽羨)하고 탄미(歎美)하며 경모(敬慕)하고 숭상(崇尙)하여, 모두 이들(육신을 가리킴)의 죽음을 자기 몸으로 대신 백 번이라도 바꾸고자 한 것은, 도리어 이들에게 있고 저들(발길을 달리한 자, 즉 세조를 따른 자들을 말함)에게 있지 않으니, 어찌 사가(史家) 사마천(司馬遷)이 이른바 ‘그 중함이 저와 같고 그 가벼움이 이와 같다.’는 것이 아니겠으며, 어찌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본심(本心)은 하늘이 다하도록 떨어지지 않아서 위무(威武)로도 녹일 수 없고 세리(勢利)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아름답다.
선생은 창녕인(昌寧人)이다. 영락(永樂 명 성종(明成宗)의 연호) 무술년에 홍주(洪州)의 적동리(赤洞里)에서 태어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 집을 존숭하여, 지금까지 들보와 기둥이 아무 탈 없이 보존되었다. 마당에는 늙은 오동나무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선생이 등제(登第)하여 영광스럽게 돌아와서 잔치를 베풀 때에 그 가지에 악기(樂器)를 매달았다.”
고 한다. 금상(今上) 9년에 여흥(驪興) 민공 유중(閔公維重)이 이곳의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이곳을 찾아보니, 나무는 늙고 집은 허물어져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황폐되어 쓸쓸한 것뿐이었으나, 오산(烏山)이 곁에 우뚝이 서 있어서 하늘을 떠받치고 냇물을 가로막은 형세가 있으므로, 그 사람됨을 상상하며 크게 우러르는 회포를 이기지 못하여 문득 돌을 세워 그가 살던 집을 표시하였다. 때에 내가 명(命)을 받들어 한양에 가서 장원서(掌苑署) 밖에 우거했는데, 장원서 안에 늙은 소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한 노인이 그 나무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전에 선생이 살던 곳으로서 관에 적몰되어 공해(公? 관청(官廳))가 되었는데, 이것은 실상 선생이 손수 심은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그 나무는 여기저기 멍이 들고 모지라져서 겨우 살아 있는 정도였지만 오히려 세한(歲寒)을 견디어 내는 뜻이 있어 바로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이 변고(變故)를 경력하면서도 굳세게 홀로 서서 늠연히 변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지난 일을 더듬어 찾아보매 감회가 일어나서 개연히 길이 탄식하였는데, 마침 민공(閔公)이 편지를 보내오기를,

“적동리(赤洞里)에 돌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글을 지어 기록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고 하였기에, 마침내 여기에 써서 남겨 두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비록 천백 년의 긴 세월이 흐르더라도 오히려 피(彼)와 차(此)를 아울러 알 수 있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