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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선군(朗善君) 서첩(書帖)의 발 - 허목(許穆)-

천하한량 2007. 4. 6. 02:23

낭선군(朗善君) 서첩(書帖)의 발
 

왕손 낭선군은 글씨를 좋아하여 역대의 글씨 중에 고인(古人)들과 같이 뛰어난 것을 구해들였는데, 우리나라의 고금(古今)의 글씨는 거의 다 갖추었다. 지난해에는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가서 형산(衡山)의 신우비(神禹碑)를 얻어 용사(龍蛇)와 초목(草木)의 모양으로 된 글씨를 보았으니, 왕손은 글씨에 대하여 실로 해박하게 보았다고 하겠다.
이 늙은이도 자못 글씨를 좋아하기 때문인지 비루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나라 여러 명인(名人)들의 친묵첩(親墨帖)을 보여 주며 한 말씀 쓰라고 하였다. 그 서첩에 있는 사람은 신라(新羅)의 김생(金生), 고려(高麗)의 이군해(李君? 암(?)의 초명(初名). 호는 행촌(杏村))ㆍ원천석(元天錫), 본조(本朝)의 안평 공자(安平公子 세종(世宗)의 아들. 이름은 용(瑢), 호는 비해당(匪懈堂))ㆍ안침(安琛 호는 죽계(竹溪))ㆍ이개(李塏 호는 백옥헌(白玉軒),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로부터 김현성(金玄成 호는 남창(南窓))에 이르기까지 32인인데, 특별히 명필로 후세에 이름난 사람이 많이 있으니, 이런 것을 어떻게 얻어 볼 것이랴. 내가 듣고 본 바로는 김생은 신라 원성왕(元聖王) 때 사람이라 가장 오랜 분으로 불경(佛經)을 썼는데, 지금 천 년이 되었어도 그 진적(眞蹟)이 많이 전해 온다.
《필원잡기(筆苑雜記)》에 글씨를 논하여 ‘우리나라는 신라로부터 지금까지 김생을 제일로 친다.’고 하였다. 시중(侍中) 이군해의 글씨도 크게 전하여 《고려사(高麗史)》에 ‘《상서(尙書)》의 태갑(太甲) 3편(篇)을 써서 임금을 간(諫)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는 자앙(子? 원(元)의 조맹부(趙孟?)의 자, 호는 송설도인(松雪道人))을 배워서 그 변화는 신의 경지에 들었으니,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에서 아주 괴건(魁健)한 대자(大字)로 처음 보았고, 운봉(雲峯) 황산(荒山)에 있는 성조(聖祖 이 태조(李太祖))의 대첩비(大捷碑)에서 이암(?菴 송인(宋寅))의 글씨를 보았는데, 매우 뛰어난 글씨였다. 《기묘명인전(己卯名人傳)》에 김자암(金自庵 김구(金絿))은 묘예(妙藝)라고 칭했으며,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글씨는 지금 온 세상에 이름이 가득찼으며, 또 황(黃 황기로(黃耆老)이니 호는 고산(孤山))ㆍ양(楊 양사언(楊士彦)이니 호는 봉래(蓬萊))ㆍ한(韓 한호(韓濩))ㆍ백(白 백광훈(白光勳)이니 호는 옥봉(玉峯))의 무리가 글씨로 당시에 이름났다. 지금 황기로(黃耆老)의 초서(草書)의 대자(大字) 같은 것은 능히 귀신도 놀라 물러나게 하며, 양봉래(楊蓬萊)가 백운계(白雲溪)와 풍악동(楓岳洞)의 돌에 새긴 글씨는 더욱 기이하다. 일찍이 그가 ‘산중에 들어가서 등나무와 칡덩굴을 보고 필력(筆力)을 얻어 통신(通神)했다.’ 하였으며,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는 천하에 이름이 났는데 처음에 그 글씨가 중국에 들어가니, 중국 사람들이 보고 평하기를 ‘목마른 말이 개천으로 뛰어드는 것 같다.’ 했다. 백옥봉(白玉峯)의 글씨는 구슬 갈고리와 옥끈 같다.’고 불리었고, 아계공(鵝溪公)은 8세에 글씨를 써서 신동이라 일컬어졌고,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말년에는 김현성(金玄成)이 임금의 명을 받고 서경(西京) 기자(箕子)의 비(碑)를 썼다.

무신년 4월에 녹봉(鹿峯) 미수는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