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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성 선생(成先生)의 신주(神主)를 옮겨 봉안(奉安)한 기(記) -송시열(宋時烈)-

천하한량 2007. 4. 6. 02:33

기(記)
 
 
홍주(洪州) 노은동(魯恩洞)에 성 선생(成先生)의 신주(神主)를 옮겨 봉안(奉安)한 기(記)
 

금상(今上) 임자년(1672, 현종13) 4월 모일에 서울의 유사(儒士) 남택하(南宅夏), 장시현(張始顯), 여필관(呂必貫) 세 사람이 편지를 보내오기를,

“모월 모일에 호조(戶曹) 서리(書吏) 엄의룡(嚴義龍)이 와서 ‘성모(成某 성삼문(成三問)을 말함)의 신주(神主)가 인왕산(仁王山)의 무너진 벼랑 사이에 있다.’ 하였습니다. 생 등(生等)은 놀라고 또 이상하게 여기며 달려가 보니, 무너진 벼랑 밑 돌무더기 사이에 자기(磁器)가 있고 그 안에 신주 셋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과연 성 선생의 신주였습니다. 먼지를 털고 이끼를 닦아낸 다음 살펴보니, 바깥쪽에 성명(姓名) 세 글자와 나이는 무술생[年戊戌生]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고 함중(陷中)에도 그와 같은데, 다만 생(生)이라는 한 글자가 적어서 안팎을 합친 글자가 열 셋이었습니다. 생 등은 송연(悚然)해지는 심신(心神)으로 절터에 예(禮)를 올렸습니다. 나머지 두 위는 곧 선생의 외손이었던 참찬(參贊) 박호(朴壕) 부부(夫婦)의 신주였고, 쓰여진 글자는 가례(家禮)의 서식(書式)과 똑같았습니다. 생 등은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를 몰라 하다가 본디 있던 곳에 도로 봉안(奉安)해 두었으나, 장차 어떻게 하면 마땅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슬피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은 세조(世祖) 병자년(1456) 이후 수백 년이 지났다. 비록 그 당시에 높이 드러났던 일도 메아리가 끊기듯이 다 묻혀졌고, 그 귀신은 영검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선생은 모진 형벌과 참혹한 화(禍)를 당한 터이라 어느 누가 이 신주를 만들었으며, 어느 누가 이 제사를 받들었으며, 또 누가 매안(埋安)했기에 지금에 이 신주가 나타났단 말인가. 예(禮)로써 말한다면 복친(服親)이 이미 끊어졌으니, 오래전에 조매(?埋)했음이 마땅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큰 절개(節介)와 높은 의기(義氣)는 백세토록 향사함이 마땅한데, 지금 몇 해나 궐향(闕享)되었던가. 이번 일은 대개 하늘이 엄리(嚴吏 엄흥도(嚴興道)를 말함)의 충심을 유도해서 이런 기이한 다행이 있게 한 것이다. 대저 하늘이 이미 계시(啓示)했는데, 인간이 또 매안함은 어찌 차마 할 바이겠는가. 일찍이 감사(監司) 민유중(閔維重)을 통해 들으니, 선생의 옛집이 아직도 홍주 노은동에 있고, 당시 뜰에 섰던 나무들도 탈이 없다고 하였다. 우선 거기에 봉안한다면 예(禮)에 이른바 ‘신이 집으로 돌아온다.[神返室堂]’는 것이니, 비록 당초에는 못했으나 지금에 와서 거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뜻으로 답(答)하고 나서 시골 사우(士友)에게 알렸더니, 와서 남씨(南氏)와 여씨(呂氏) 등의 편지를 보고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우들도 있었다. 얼마 후에 남씨와 여씨 등 여러 사람이 다행히도 나의 말이 이치에 어긋난다고 여기지 않고 곧 홍주에 있는 선생의 겨레붙이에게 통고하고는, 우선 신여(神轝)로 신주를 받들어 선생의 미생(彌甥) 엄찬(嚴纘)의 집에 봉안해 두었다. 그러자 진신(搢紳)ㆍ장보(章甫)가 다투어 와서 배례(拜禮)했는데, 전 장령(掌令) 조세환(趙世煥)도 외손(外孫)이고 유학(幼學) 김근(金瑾)은 선생이 그의 외족(外族)이었다. 홍주에서 함께 엄씨의 집으로 와서 신주를 모시고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의논했는데, 그때 병조 판서 민공 정중(閔公鼎重)이 관학(官學)의 제생(諸生)을 거느리고 한강 가에 와서 배송(拜送)하려다가 마침 공사(公事)가 있어서 하지 못하였다.
5월 계해일에 길을 떠났는데, 조세환과 김근이 수행(隨行)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우형(金宇亨)이 이들 일행이 지나가는 각 고을에 공문(公文)을 보내 호송(護送)토록 하였다. 진위 현령(振威縣令) 이집성(李集成)만이 병(病)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 나머지는 정성을 다하였다. 그중에 수원 부사(水原府使) 성후설(成後卨)은 심지어 풍성하고 깨끗한 제수(祭羞)를 마련하여 동헌(東軒)에서 제향하고, 또 야외(野外)에도 공장(供帳)을 많이 설치해서 환영(歡迎)과 환송(歡送)을 모두 멀리까지 하였다. 고택(古宅)에 도착하기 5리쯤 앞서 선생의 황고(皇考) 총관공(摠管公)의 묘소(墓所)가 길 옆에 있는데, 역시 선생과 함께 순사(殉死)한 분이었다. 드디어 신주 모신 가마를 묘 앞에 멈추고 선생의 평소 효성스럽던 마음을 달래었다. 이날 온 고을 사람이 나와 맞이하는 행렬이 거리를 메웠다. 드디어 마루에 들어가 북쪽 벽 아래 남향으로 봉안하였다. 대개 민 감사가 일찍이 그 집 앞에 비석(碑石)을 세우려고 수리(修理)부터 먼저 하였다. 그러므로 들보와 기둥 따위는 갈아 넣지 않았으나 벽은 깨끗이 도배되어 있었으니, 이번 일이 있기를 기다린 듯도 하다. 이에 그날 정묘에 대제(大祭)를 지냈는데 본 고을 목사(牧使) 이후 섬(李侯暹)이 초헌(初獻)하고 면천 군수(沔川郡守) 민후 균(閔侯勻) 또한 외손(外孫)으로서 아헌(亞獻)을 했으며, 종헌(終獻)은 장령 조세환이 하였다. 그 외 수령(守令)과 여러 유생(儒生)은 모두 제자리에서 부복(俯伏)하여 각자 슬픔과 정성을 다하였다.
아, 누가 시켜서 이렇게 되었는가. 사실 이렇기를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하다. 내가 여기에 대해 따로 느낀 바가 있다. 노릉(魯陵)이 영월(寧越)에서 변고(變故)를 당했을 적에 시신(屍身)이 길 옆에 버려져 있었으나 감히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고을 아전이었던 엄흥도(嚴興道)가 홀로 가서 임곡(臨哭)하고 관(棺)을 가져다가 염습(殮襲)해서 장사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임금의 무덤이라 이르면서 여러 대 임금이 제사를 올린 데가 곧 여기이다. 고(故) 음애(陰崖 이자(李?)) 이 선생(李先生)이 기(記)하기를,

“예부터 충렬(忠烈)한 사람이 반드시 여러 대를 벼슬한 집과 빛나는 씨족(氏族)한테서만 꼭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당시에 임금을 팔아 이(利)를 구하면서 그 임금을 반드시 모진 화변에 넣은 다음에야 마음에 쾌하게 여긴 자를 엄군(嚴君)과 비교한다면, 어떻다고 하겠는가. 시골 부인(婦人)네와 마을 아이들이 지금까지도 몹시 우울하게 여겨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곤 하니, 사람의 본성(本性)은 속이기 어려움을 과연 알겠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어물을 포록(褒錄)하기를 청했지만, 이번에 선생의 신주를 또 엄의룡이 발견했고 또 임시로 엄씨의 집에 봉안했는데, 이들은 모두 영월이 본관(本貫)이었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다. 모르기는 하지마는 이는 노릉(魯陵) 군신(君臣)의 다행이요, 또한 여러 엄씨의 다행이다.
근래에 박 참찬의 종현손(從玄孫)으로서 이산(尼山)에 살고 있는 이의 말을 들으니,

“병자년(1456, 세조2) 화변이 일어나던 날 선생의 부인 김씨가 손수 쓴 선생의 신주를 안고 노속(奴屬 연좌죄로 남의 노비(奴婢)가 되는 것)되어 간 곳에서 제사하였는데, 부인이 죽은 후에는 그 신주가 참찬의 집으로 갔고, 참찬도 후사(後嗣)가 끊어지자 아울러 매안했다.”
하였는데, 그 말이 모두 신빙할 만하였다. 부인의 묘는 지금 노은동에 있으나 향화(香火)가 끊어졌으니 아, 슬픈 일이다.
서울과 지방 여러 유생이 또 고택 옆에다가 사당을 지어서, 당시 선생의 동지(同志)였던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 등 다섯 선생을 아울러 향사하려고 한다. 대개 세조대왕이 일찍이 ‘성모(成某)는 만세 충신(萬世忠臣)이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하 선생의 사당을 선산(善山)에 세웠고, 박 선생의 비석을 회덕(懷德)에 세웠으나, 조정에서 금단(禁斷)하지 않았다. 민 감사가 마련했던 비석은 이미 고택 앞에 가져왔으나 미처 다듬어서 글을 새기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사당과 비석 두 가지 일을 고을 이 목사(李牧使)와 면천 민 군수(閔郡守)가 끝까지 경영할 것이라 한다.

이해 7월 일에 은진 송시열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