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이개 ▒

육신총(六臣塚)이 서호(西湖)의 노량진(露梁津) 강 언덕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 허목(許穆)-

천하한량 2007. 4. 6. 02:21

구묘문(丘墓文)
 
 
육신 의총비(六臣疑塚碑)
 

세종 명신(名臣)에, 박팽년(朴彭年)ㆍ하위지(河緯地)ㆍ성삼문(成三問)ㆍ유응부(兪應孚)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이 있어 육신(六臣)이라 부르는데, 그 사적은 육신본전(六臣本傳)에 실려 있다. 이른바 육신총(六臣塚)이 서호(西湖)의 노량진(露梁津) 강 언덕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이곳에서 죽였다.’고 한다. 모두 비석에 새기기를 ‘박씨(朴氏)ㆍ유씨(兪氏)ㆍ이씨(李氏)ㆍ성씨(成氏)의 묘(墓)’라고 하였는데 박씨의 묘가 가장 남쪽에 있고 그 북쪽이 유씨의 묘, 그 북쪽이 이씨의 묘, 그 북쪽이 성씨의 묘이며, 또 성씨의 묘가 그 뒤 10보쯤 떨어진 지점에 있는데 성씨 부자의 묘로, 뒤에 있는 것이 성승(成勝)의 묘라고 한다.
아, 육신이 죽었을 때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 지낸 자는 누구이고, 비석을 세워 그 묘를 표지(標識)한 자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겠으니, 자취가 다 없어져서 후세에는 알 수 없음이리라. 육신은 친척이 모두 멸족되어 씨도 남지 않았으니, 이는 필시 평소 교류하던 자가 그 의리를 사모하여 화고(禍故)로써 서로 저버리지 않고 몰래 각각 그 시체를 표시하였다가 이처럼 나란히 장사를 지내고, 돌에 새겨 그곳을 표지하되 일부러 그 이름을 숨겨서 마치 부인의 비석처럼 모씨 모씨(某氏某氏)라고 한 것일 터이니, 그의 마음 참으로 가상하도다.
추강 처사(秋江處士 남효온(南孝溫))가 ‘육신 열전(六臣列傳)’을 짓고 또 당시의 현인(賢人)과 절사(節士)의 행적을 썼는데, 기록이 꽤 상세하다. 그런데 육신의 묘소는 말하지 않았으니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모두 당시의 일이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영남(嶺南) 일선부(一善府 선산(善山))에 하씨의 묘는 있는데, 유독 유씨(유성원)는 장지가 없다. 그 전기에 이르기를,

“모의(謀議)가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일이 이뤄지지 못할 것을 알고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관리가 추후에 그 시체를 가져다가 찢었다.”
고 하였다. 그렇다면 처형한 시기가 서로 같지 않고 시신을 찢은 장소도 또 같지 않아서 그 장사 지낸 곳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혹 불행하여 끝내 장지가 없는 것인지. 아, 모두 알 수가 없도다.
호서(湖西) 홍주(洪州)에 성씨의 묘가 있고, 충주(忠州) 덕면리(德面里)에 박씨의 묘가 있다. 성씨의 외손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씨의 묘소는 사지 하나만을 매장한 것이다.”
라고 하니, 박씨의 묘소도 또한 그러한지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종적이 이미 인멸되었으니 민간에서 전하는 말을 다 믿을 수가 없다.”
고 하니,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이는 강상(江上)의 부로(父老)들이 서로 전하여 오늘날에 이른 것에 불과할 뿐, 그 처음 누가 보고 누가 기록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금에 와서는 이미 옛 일로 증거 댈 만한 것이 없으니, 고집해서 꼭 믿을 것이라고 할 수도 없고 반대해서 꼭 믿지 못할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지금부터 수백 년 이후에는 세대가 더욱 멀어져 민간에서 더욱 전하지 않을 것인데, 묘소가 오래 변하여 반신 반의 속에 사라진다면 지사(志士)의 추한(追恨)이 무궁할 것이다. 하물며 인인(仁人)ㆍ효자(孝子)의 마음임에랴.
박씨(박팽년)의 6세손이며 지금 동궁(東宮)의 좌익찬(左翊贊)인 숭고(崇古)가 묘소를 수축한 다음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나에게 부탁하여 그 의심된 점과 미더운 점을 갖추어 기록하여 후세에 민몰되지 않게 하려고 하니, 아, 어질도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충신의 무덤은 / 忠臣之埋
지사가 비통해하는 바인데 / 志士之悲
민간에서 전하는 말 / 氓俗之傳
백대의 의혹이로세 / 百代之疑
서쪽 사람 눈 우묵하고 수염 많은 이로 / 西之人深目而髥
그 사실 아는 자 누구인가 / 得其實者伊誰


금상(今上) 3년 신묘년 5월 하지일(夏至日)에 후학(後學) 양천(陽川) 허목(許穆)은 쓴다.

[주D-001]모의(謀議)가 누설 :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사육신(死六臣)은 그 복위를 모의, 명 나라 사신 송별 연회석상에서 운검(雲劍)을 쥐게 된 성승(成勝)ㆍ유응부(兪應孚)에게 세조를 죽이게 했는데, 당일엔 운검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던 중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金?)이 밀고하여 성사하지 못하고, 극형을 당하였다. 《燃藜室記述 卷4 端宗朝故事本末 六臣謀復上王》
[주D-002]서쪽 사람 …… 많은 이 : 실전(失傳)한 묘소를 찾아 준 신인(神人)을 말한다. 당(唐) 나라 정원(貞元) 연간에 조공긍(趙公矜)이 유주(柳州)에서 객사(客死)하여 관가에서 장사 지내 주었는데, 그후 아들인 조내장(趙來章)이 장성하여 묘소를 찾았다. 그러나 아는 이가 없어 날마다 들에서 울다가 점을 쳐 보았더니, ‘을사일에 들에 나가면 서쪽 사람으로 눈이 우묵하고 수염 많은 이가 있을 것인데 그에게 물으면 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말대로 했더니 그가 찾아 주었다 한다. 《河東先生集 卷2 故襄陽丞趙君墓誌》
[주D-003]금상(今上) 3년 신묘년 : 신묘년은 1651년으로 효종 2년이다. 여기서 3년이라고 한 것은 즉위년(卽位年)까지 포함해서 말한 것이거나, 아니면 2년의 오기라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