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이개 ▒

이개(李塏)는 목은(牧隱 이색)의 증손인데, 시(詩)와 문이 뛰어나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다.,-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이정형(李廷馨)-

천하한량 2007. 4. 6. 02:17

본조선원보록(本朝璿源寶錄)

 

○ 세조가 전위(傳位)를 받던 날, 성삼문이 예방 승지(禮房承旨)로서 옥새(玉璽)를 받들어 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잠길 정도로 통곡하였다. 세조가 바야흐로 땅에 엎드려 굳이 사양하다가 때때로 머리를 들어 바라보았다. 삼문이 박팽년ㆍ이개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 및 무인 유응부(兪應孚)와 노산의 외숙(外叔) 권자신(權自愼)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復位)시키려고 도모하였는데, 김질(金?)도 그 모의(謀議)에 참여하였다. 삼문이 김질에게 이르기를,

“일이 성공되는 날에는 너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이 영상이 될 것이다.”
하였다. 삼문 등의 거사 기일이 여러 번 어긋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자, 질이 이에 그 음모를 정창손에게 누설시켰는데, 창손이 곧 질과 함께 대궐에 들어가 비밀히 아뢰기를,

“질과 삼문 등이……하였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하였다. 세조가 편전(便殿)에 나와 앉으매, 삼문도 승지로서 입시(入侍)하였는데, 세조가 무사를 시켜 끌어 내려 질이 밀고한 말대로 힐문하니, 삼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모두 사실이오. 상왕이 나이 한창 젊으신데, 왕위를 내놓았으니, 다시 세우려는 것은 신하로서의 당연히 할 일입니다. 다시 무엇을 물으시오, 나으리가 평일에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인증하더니,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하고, 김질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밀고한 것은 오히려 간사한 행위로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들의 뜻은 다만 이렇게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였다. 쇠 조각을 불에 달구어 배꼽 밑에 놓으니 기름이 끓으며 불이 붙어 타는데, 삼문의 안색이 변하지 않고, 쇠 조각이 식기를 기다려 말하기를,

“다시 뜨겁게 달구어 오너라.”
하였다. 또한 그의 팔을 끊으니 천천히 말하기를,

“나으리의 형벌이 참혹하오.”
하였다. 이때에 신숙주가 자리에 있었는데, 삼문이 꾸짖기를,

“전일에 너와 더불어 집현전에 같이 당직할 때에, 세종께서 원손(元孫)을 안으시고 뜰에 거닐면서 말씀하시기를,‘과인(寡人)이 죽은 뒤에 너희들이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셨는데, 그 말씀이 아직도 귀에 남아 있거늘 너는 잊었느냐?”
하니, 숙주가 몸둘 바를 모르므로 세조가 숙주를 피하게 하였다. 삼문이 죽음에 다다라 감형관(監刑官)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보좌하여 태평 성대를 이룩하라. 나는 죽어서 돌아가신 임금을 땅 밑에서 뵈리라.”
하고, 그 아버지 승(勝) 및 아우 삼고(三顧)ㆍ삼성(三省)과 더불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 이개(李塏)는 목은(牧隱 이색)의 증손인데, 시(詩)와 문이 뛰어나 세상에서 중망을 받았다.

세종이 온양 온천(溫泉)에 갈 적에 이개가 성삼문 등과 함께 편복(便服)으로 행차를 따라가 고문(顧問)이 되니, 사람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여겼다.

삼문의 모사에 참여하였는데, 사람됨이 몸이 파리하고 약하나 곤장 아래에서도 안색이 변하지 아니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세조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이개의 숙부 계전(季甸)이 매우 친밀하게 출입하므로 이개가 경계한 적이 있었다.

이때서야 세조가 말하기를,

“일찍이 개가 제 숙부에게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마음에 못된 놈이라 여겼더니, 과연 다른 마음이 있어 그러하였던 것이로구나.”하였다. 이개가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나갈 때에 시를 짓기를,


우의 솥처럼 중할 때엔 삶도 또한 크거니와 / 禹鼎重時生亦大
기러기 털처럼 가벼운 데선 죽음 또한 영광일세 / 鴻毛輕處死猶榮
일찍이 일어나 자지 않고 문을 나가니 / 明發未寐出門去
현릉의 송백이 꿈속에 푸르구나 / 顯陵松柏夢中靑
하였다.

 

○ 하위지(河緯地)는 선산(善山) 사람이다. 세종 무오년(1437)에 과거하여 장원에 뽑혔다.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사직하고 선산으로 돌아갔다. 단종이 우사간(右司諫)으로 불러 벼슬이 예조 참판에까지 이르렀는데, 삼문의 모의에 참여하였다. 세조가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은밀히 타이르기를,

“네가 만약 처음 음모에 참여한 것을 숨긴다면 면할 수 있다.”
하였으나, 위지가 웃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국문을 받을 때엔 위지가 대답하기를,

“신하로서 이미 역적이란 이름을 썼으니, 그 죄가 응당 죽을 것인데, 다시 무엇을 물을 것이 있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노기가 풀려 유독 그에게는 단근질을 시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인재를 양성하여 이때에 한창이었는데, 모두 위지를 첫 손가락으로 꼽았다.

 

○ 유응부(兪應孚)는 무인(武人)으로서 날랜 용기가 남보다 뛰어나 능히 담과 집을 뛰어 넘었다. 어머니를 섬김이 효성스러웠고,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 삼문 등과 더불어 노산을 복위시키려고 모의하여, 아무날 명 나라 사신을 청하여 연회할 때를 타서 거사하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그날 세자(世子)가 임금과 한 자리에 오지 않고, 또 자리가 좁다 하여 운검(雲劍)을 가진 장수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므로 삼문 등이 그 계획을 연기하려 하니, 응부는 그래도 들어가 거사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일은 빠른 것이 좋은 것이오. 세자가 비록 한 자리에 오지 않았으나 우익(羽翼)들이 다 여기에 있으니 만약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제가 어찌 하겠는가.”
하였으나, 삼문 등이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니라 하여 굳이 말렸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일이 발각되었다. 세조가 묻기를,

“네가 어찌하려 하였느냐?”
하자, 응부가 대답하기를,

“석 자의 칼을 가지고 당신을 폐하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는데, 조무래기 선비들과는 같이 모사(謀事)할 수 없었소, 만약 진작 내 말을 들었더라면 어찌 오늘 이 지경이 되었겠소. 더 이상 사실을 묻고 싶거던 저 서생(書生)들에게 물으시오.”
하여, 듣는 사람들이 오싹하였다. 관(官)에서 그의 집을 몰수하는데 문안에 다만 떨어진 자리만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청백을 탄복하였다. 일찍이 동지들과 모인 자리에서 팔을 뽐내며 말하기를,

“한명회ㆍ권람을 죽이는데는 이 주먹이면 족하다.”
하였었다. 일찍이 함길도 절제사(咸吉道節制使)가 되었을 적에 시를 짓기를,
날쌘 매 삼백 마리 누각 앞에 앉았네 / 良鷹三百坐樓前
하였으니, 그 기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