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이개 ▒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 한공 신도 비명 병서 (議政府領議政上黨府院君韓公神道碑銘 幷書) -서거정(徐居正)-

천하한량 2007. 4. 6. 02:03

비명(碑銘)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 한공 신도 비명 병서 (議政府領議政上黨府院君韓公神道碑銘 幷書)
 

예로부터 성군(聖君)이나 명주(明主)가 천운(天運)에 맞추어 국가를 창립하는 데는 반드시 영웅 호걸의 마음을 같이 하고, 덕을 같이 하는 선비가 있어 좌우(左右)로 힘을 베풀고 모든 계획으로 돕고 도와 능히 흔하지 않은 공을 이루었다. 이러므로 주선왕(周宣王)이 중흥하매 방숙(方淑)ㆍ소호(召虎)가 보좌하고, 한광무(漢光武)가 광복(光復)하매 가복(賈復)ㆍ등우(鄧禹)가 보좌하고, 우리 세조께서 중흥하실 적에는 인재를 집결하여 호걸들이 그림자처럼 따랐으나, 계획을 주달하여 대업을 완성하게 한 것은 상당(上黨 청주)의 한충성공(韓忠成公)이 제일이었다.
공의 휘(諱)는 명회(明澮)요, 자는 자준(子濬)이며, 성은 한씨인데, 본시 청주의 대성(大姓)이다. 원조(遠祖)의 휘는 난(蘭)이니, 고려 태조를 보좌하여 삼한공신(三韓功臣)을 봉하였고,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휘 강(康)은 고종조(高宗祖)에 태상예의원사(太常禮儀院事)가 되었고, 휘 사기(謝奇)는 첨의우간의대부(僉議右諫議大夫)요, 휘 악(渥)은 삼한삼중(三韓三重)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이요, 휘 공의(公義)는 정당문학(政堂文學)이요, 휘 수(脩)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증 좌의정(贈左議政)이니 공에게 증조가 되고, 휘 상질(尙質)을 낳으니,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증 좌찬성(贈左?成)이요, 찬성이 감찰(監察) 휘 기(起)를 낳으니, 공의 아버지가 공의 공훈으로 순충 적덕 병의 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상당부원군(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上黨府院君)을 증직하였고,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씨(李氏)니, 여흥망족(驪興望族)이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이적(李?)의 따님이다. 영락(永樂) 을미년 10월 기축일에 공을 낳았는데, 대부인이 공을 밴 지 겨우 7개월 만에 나서, 사지(四支)가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로 온 집안이 기르려고 하지 않았는데, 늙은 여종이 기저귀 속에 파묻어 두고 돌보기를 매우 부지런히하여 두어 달을 지내니 점점 커가기 시작하였다. 배나 등에 검은 사마귀가 있어 별 무늬와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 조년(早年)에 부모를 여의고 낙척하여 일어서지 못하므로 증조부 참판(?判) 상덕(尙德)에게 가서 의지하니, 참판은 말하기를, “이 아이의 인격이 범상하지 아니하니 나중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거자업(擧子業 과거를 보는 공부)을 배워 장년기에 이르러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였으되, 활발하게 몸을 가지며 서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간혹 묻는 자가 있으면 말하기를, “사군자(士君子)가 궁하고 달하는 것은 운명이 있으니, 어찌 반드시 부유(腐儒)나 속사(俗士)의 흐리멍텅하여 슬퍼하고 상심하는 것을 본뜬단 말이냐.” 하였다. 길창(吉昌) 권남(權擥)과 더불어 사생의 친구를 맺어 서로 얻는 즐거움은 비록 관중(管仲) 포숙아(鮑叔牙)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며, 권공과 더불어 서로 합하여 살림살이를 돌보지 아니하고, 산수간에서 노닐며 혹 마음에 맞는 곳이 있으면 해가 다가도록 돌아올 줄을 몰랐고 성리(聲利)에는 담담하였다.
공은 일찍이 길창(吉昌)을 희롱하여 말하기를, “문장과 도덕에 있어서는 내가 진실로 군에게 양보하지만, 경륜의 사업에 이르러는 내가 어찌 그대에게 양보하겠는가.” 하며, 무릇 의논을 발표하면 탁월하고 기특하니 사람들이 다 큰 그릇이라 지목하였다.
임진년에 공의 나이 38세로 경덕궁직(敬德宮直)에 보직되었다. 이 때에 현릉(顯陵)은 승하하시고, 유충(幼沖)이 왕위(王位)에 계시어 권신 간신들이 용사(用事)하고 있으니, 나라 형세가 위태롭기에 공은 항상 세상을 분히 여기는 뜻을 품었다. 하루는 길창에게 이르기를, “시세가 이 지경에 이르러, 안평(安平)이 신기(神器)를 노리고 몰래 대신과 결속하여 성원(聲援)을 삼으니, 여러 불량 분자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붙어 한 데 뭉치어 화란의 발작이 조석에 박두하였는데, 그대는 유독 한 번도 생각이 이에 미치지 아니하니 웬 말인가.” 하니, 길창은 말하기를, “그대는 계획을 얻었었지만 그 계획을 장차 뉘와 더불어 짜낸단 말인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화란을 평정하는 것은 제세반란(濟世叛亂)의 주인이 아니면 아니되는데,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활달한 것이 한고조(漢高祖)와 같고, 영무(英武)한 품은 당태종(唐太宗)과 같으니, 천명(天命)이 돌아가는 것을 소상히 알 수 있다. 지금 자네가 그의 필연(筆硯)에 시종하고 있으니, 어찌 조용히 건의하여 일찌감치 결단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니, 길창이 공의 계획으로써 세조에게 고하고 또 말하기를, “한생(韓生)이 도략이 훌륭하여 둘도 없는 국사(國士)일 뿐 아니오라 이 세상의 관중(管仲)ㆍ악의(樂毅)이니, 공은 연릉(延陵)의 절개를 지키고자 하신다면 모르거니와, 만약 이 세상을 평정하고자 하실진대 한생을 빼고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하였다. 세조는 한 번 보고 옛 친구와 같이 대하며 곧장 앞으로 나가 손을 잡으며 하는 말이, “어찌 이제사 만나게 되었단 말인가. 지금 주상이 비록 유충(幼沖)하시나 잘 협조하면 수성(守成)할 수 있는데, 대신이 섬사(?邪)해서 용(瑢 안평대군)에게 마음을 두고 선왕의 어린 손자를 부탁하신 뜻을 저버리려 하니 조종(祖宗)의 선령(先靈)이 장차 어느 지경에 계시게 될는지 모르겠다.“ 하고, 말을 마치자 눈물을 흘렸다. 공도 또한 강개하여 반정(返正)해야 한다는 것을 극력 진술하니, 세조는 말하기를, ”형세가 외롭고 약하니 어찌하랴.” 하므로, 공은 말하기를, “명공(明公)이 종실의 후손으로서 사직을 위하여 난적(亂賊)을 토벌하는 것은 명정언순(名正言順)하니 절대 성공하지 못할 이치가 없습니다. 옛말에, ‘당연히 결단할 것을 결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앙화를 받는다.’ 하였으니, 원하건대 공은 재삼 생각해 보소서.” 하니, 세조는 “경은 더 다짐하지 말라, 나는 마음이 결정되었다.” 하고, 이로부터 무릇 비밀한 모계는 모두 공에게 맡겨 계획하게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한고조(漢高祖)가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을 임용하였으나 제승(制勝)에 있어서는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썼고, 당태종이 비록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임용하였으나 전별(戰伐)에 대해서는 포공(褒公 이적(李勣))과 악공(鄂公 울지경덕(蔚遲敬德))을 썼다.” 하고, 드디어 무신으로 용맹과 재간이 있는 자 수십 명을 천거하였다. 계유년 10월에 장차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는데, 한두 명이 의구심을 품고 군중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므로, 공은 칼을 뽑아들고 크게 외치기를, “세상에 나면 반드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마다 변할 수 없는 것이니, 사직을 위해 죽는다면 그저 죽는 것보다 낫지 아니하냐. 감히 다른 마음을 갖는 자는 베어 없앤다.” 하고, 이에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드디어 원흉을 제거하고 머리칼을 빗질하듯 풀을 매듯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다. 이는 비록 세조의 영특하신 모의와 슬기로운 결단에서 나온 것이지만 산가지[籌]를 돌리어 계책을 결단한 공에 있어서는 공의 힘이 실로 많았다. 드디어 군기판관(軍器判官)에 발탁되었다가 이윽고 사복소윤(司僕少尹)에 천직되고, 훈(勳)을 책봉하여 수충위사 협책정난 공신(輸忠衛社?策靖難功臣)의 호를 내리고, 갑술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제수하였다. 을해년 6월에 세조가 즉위하시자 동덕좌익공신(同德佐翼功臣)의 호를 내리고 우부승지로 승차하였다. 병자년 5월에 황제가 대감(大監) 윤봉(尹鳳)을 보내어 관복(冠服)을 내려주므로, 세조는 장차 6월 초하룻날에 광연루(廣延樓)에서 잔치를 베풀기로 하였는데, 역당(逆黨)이개(李塏)ㆍ성삼문(成三問) 등이 이 날을 기하여 대사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공은 아리기를, “광연루가 협착하오니 세자는 잔치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사옵고 운검(雲劒 칼을 차고 임금을 모시는 직) 이하 여러 장수들도 역시 입시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니, 주상은 시인하였다. 삼문(三問)의 아버지 승(勝)이 운검을 차고 곧장 들어가기에 공이 꾸짖어 제지하니, 역당은 일이 잘 되지 않을 것을 알고 먼저 공을 해치려 하는 자가 있었는데, 삼문의 말이, “대사를 이루지 못할 바에야 비록 한모(韓某)를 죽인들 무엇이 유익하랴.” 하였다. 이튿날 일이 탄로되어 모두 복주(伏誅)하게 되었다. 광연루의 잔치에 세자를 참석 못하게 하고 무사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게 한 그 깊은 꾀와 원대한 생각이 사람의 의사 밖에 뛰어나서 원흉이 과연 그 간계를 부리지 못하였으니, 이는 비록 조종의 명명(冥冥)한 가운데 부조하신 힘이지만 역시 공의 충성이 하늘에 묵묵히 감동되어 하늘이 또한 돕게 된 것이 아니랴. 겨울에도 승지로 승격하자 항상 유악(?幄)에 거하여 기정(機政)을 긴밀히 도우니 주상은 말씀하시기를, “한모는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다.” 하였다.
정축년에 계급을 뛰어 올려 숭정대부 이조판서 상당군(崇政大夫吏曹判書上黨君)을 제수하였다. 겨울에 세자 책봉을 청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갔다. 무인년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옮겼었다. 이때에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가 흉년이 들었기에 공을 명하여 순찰사를 삼으니, 공은 마음을 다하여 구호하니 백성이 힘입어 살아났다. 이에 앞서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이 건의하기를, “3도의 주(州)ㆍ현(縣)이 개 이빨처럼 서로 착잡해서 경계가 바르지 아니하니, 마땅히 큰 데를 베어내서 작은 데와 합병하여 중(中)을 기하도록 해야 하오. 또 경상도의 지세포(知世浦)ㆍ조라포(助羅浦)와 연화도(蓮花島)ㆍ욕지도(浴池島) 등은 모두 없애 버려야 옳다.” 하니, 공은 아뢰기를, “주ㆍ현을 착잡하게 만든 것은 대소가 서로 유지하는 제도를 체득한 것이요. 하물며 경계를 그어놓은 적이 이미 오래인데 하루아침에 변경한다면 백성이 반드시 소란할 것이며, 또 두 포구와 두 도서는 왜인(倭人)에게 고기잡는 것을 허하여 길을 빌려주고 세금을 받으며 왕래를 정찰하고 있으니 이보다 좋은 법이 없는데, 지금 파한다면 이는 울타리를 철폐하여 호랑이 떼를 높게 하는 격이라 변방의 환난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하니, 그 의논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능성(綾城)은 또 건의하기를, “우리 동방 삼국이 솔밭처럼 대치하여 있을 적에는 나라마다 각기 십만의 병력이 있었는데, 본조에서는 그 땅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군의 수효는 도리어 미치지 못하니, 누락된 호구와 숨은 병정을 낱낱이 적발하여 군대에 편입시키도록 하시옵소서.” 하니, 주상이 그대로 하였다. 그래서 주무자는 되도록 액수를 불리고자 하여 한집안에 남자가 열명이라면 아홉 명을 뽑아서 군사를 만드니 백성이 능히 견딜 수가 없었다. 공은 장계하기를, “군사는 정(精)한 것에 치중하여야 하오며 반드시 많은 것에 치중할 필요는 없사오니, 정지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하니, 주상은, “잘한 생각이라, 칭찬하시고, 물의도 모두 쾌하게 여겼으나 군적이 이미 닦아진 이상 졸연히 면하기란 쉽지 아니하여 그 폐단이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남는 것이 있다.
기묘년에 강원ㆍ황해ㆍ평안ㆍ함길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무마하고 조치하는 것이 모두 기회에 적중하니, 교서(敎書)를 내려 포양하고 숭록대부의 계급을 가수(加授)하였다. 경진년에 주상이 서쪽을 순행하시게 되어 공은 마중 나가 길 옆에서 뵈오니, 주상은 노고를 순절(諄切)히 위로하시고 어가(御駕)가 순안(順安)에 이르렀다. 장차 환궁하려 할 적에 공이 모시고 가겠다고 청하니 주상은 말씀하시기를, “경(卿)은 나라의 장성(長城)이라. 동요되어서는 안 되니 어서 가서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신사년에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輔國崇祿大夫上黨府院君)으로 승진되고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경진년에 북정(北征)이 있은 뒤로부터 여러 종류의 야인(野人)들이 벌처럼 진치고 개미처럼 집결하여, 기회를 편승하여 몰래 움직이니 변경에 걱정스러운 일이 많았다. 주상은 노하여 친히 정벌하고자 하니 공은 장계하기를, “용렬한 조그만 무리 때문에 친정(親征)까지 하실 필요는 없사오니, 신이 비록 노둔하고 비겁하오나 족히 제지할 수 있사옵니다.” 하니, 주상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경을 의지하는 것이 우뚝한 장성과 같으니, 경이 간다면 다시 북방을 잊지 못하는 근심이 없겠다.” 하였다. 대궐에 나아가 하직을 고할 적에 공은 아뢰기를, “신이 성산(聖算)을 받들어 일을 행할 것이오니, 무슨 어려운 일이 있사오리까. 다만 항복을 받는 것이 원이오니 한갓 목을 베어 바치는 것만을 능사로 삼지 않겠사옵니다.” 하니, 주상은 말씀하시기를, “곤외(?外)의 일은 경이 임의로 처리하라.” 하였다.
공이 육진(六鎭)에 당도하자 크게 공격할 기구를 수리하여 먼저 위엄과 무력을 과시하고 첩자(諜者)로 하여금 적에게 말하기를, “처자를 안보하고 가옥을 사랑하는 것은 인정이 마찬가지다. 너희들인들 어찌 이 마음이 없겠느냐. 너희가 만약 속히 항복한다면 그만 두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깊이 들어가서 소굴을 소탕하여 모두 죽이고야 말 것이다.” 하니, 추장이 와서 뵙고 하는 말이, “자식이 죄가 있으면 아비가 당연히 대질해야 하지만 만약 허물을 고친다면 무마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까. 원하건대 공은 우리를 살려 주소서.” 하므로, 공은 대우를 그전과 같이하니 여러 종족의 야인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였다. 주상은 기뻐하시며 말씀하기를, “싸우지 아니하고 남의 군사에게 굴복을 받는 것은 선(善) 중에서도 최선이다.” 하였다. 임오년 여름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을 제수하고 계속하여 4도(道) 체찰사(體察使)를 겸직하게 하였다. 계미년에 좌의정(左議政)으로 승격하였다. 장차 4도를 순찰하게 되자 동궁(東宮)에게 명하여 보제원(普濟院)까지 전송하게 하였다. 갑신년에 공이 장계를 올리기를, “의주(義州)의 하류(下流)에 진(鎭)이 없으니, 만약 적이 변란을 일으키면 외로운 성이 응원이 없고, 희천(熙川)과 영흥(永興)이 서로 거리가 심히 멀어서 만약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멀리서 구원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의주 하류에 인산진(麟山鎭)을 두고 희천과 영흥의 사이에 영원군(寧遠郡)을 두는 것이 편리하고 유익할 것 같사옵니다.” 하니, 주장은 응종하였다. 병술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승격하고 예문관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藝文館弘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를 겸임하였다가 곧 병으로 사직하니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정해년 가을에 공이 병으로 사직하고 온천(溫泉)에 가니 주상은 세자에게 명령하여 제천정(濟川亭)까지 나가서 전송하게 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유교(遺敎)를 받들어 한두 명의 대신으로 하여금 정원(政院)에 윤번으로 나와서 서무(庶務)를 결제하게 하였다. 하루는 혜성(慧星) 나타나니 공은 장계를 올리기를, “천변(天變)은 두려운일이옵니다. 창덕궁(昌德宮)이 성이 없어 금어(禁禦)가 소우(?虞)하니 마땅히 중신(重臣)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남이(南怡)ㆍ강순(康順)이 반역을 도모하여 복주(伏誅)하였다. 그래서 공훈을 책정하여 정난 익대 공신(定難翊戴功臣)의 호를 내렸다. 기축년 봄에 다시 영의정을 제수하고 가을에 사직하기를 원하므로 상당군(上黨君)을 봉하고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수하게 하였다.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여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임시 청단(聽斷)을 함께 하게 되자 명하여 이조(吏曹)와 병조(兵曹) 양 판서를 겸직하게 하니 공이 굳이 사양하였다. 왕후는 말씀하기를, “선왕이 경을 사직의 신하라 이르셨는데 지금 국상(國喪)이 내리 겹치어 인심이 흉흉하니 대신이 홀로 편안히 있을 때가 아니외다. 경은 선왕의 은혜를 잊었는가.” 하니, 공은 눈물을 드리우며 하는 말이, “이 몸이 죽지 않는 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생각하오나 다만 노신(老臣)이 재주는 부족하고 권세만 중하오니 국사를 그르칠까 염려되옵니다.” 하였다. 왕후는 공의 뜻이 견고함을 알고 다만 병조판서만을 겸직하게 하니, 공이 기무(機務)에 정성을 다하여 비록 병정(兵政)의 소관이 아니라도 건백(建白)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신묘년에 공훈을 책정하여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철권(鐵券)을 내리고, 갑오년에 좌의정(左議政)을 제수하였는데 곧 사직하였다. 을미년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일찍이 건의 한 자가 있어 영안남도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를 혁파(革罷)하고자 하여 여러 신하에게 의논할 것을 명령하니 모두 하는 말이, “당연히 혁파해야 한다.” 하였는데, 공은 홀로 말하기를, “남도를 설치한 것은 북도를 응원하기 위한 때문이옵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당해도 만약 남도가 있어 북도와 더불어 향응하여 안팎이 서로 제어하였던들 저 조그마한 무리야말로 주머니 속에서 물건 찾아내는 것 같았을 것이오니, 족히 말할 나위가 있사오리까. 이 기회를 잃어서 적의 형세가 팽창해졌으니 족히 주먹을 쥐고 땅을 치며 분개할 일이옵니다. 세조께서 창설하신 본의는 옅은 소견이나 사사 지혜로는 능히 측량할 바 아니오니 혁파하자는 의논에 대해 신은 그것이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사옵니다.” 하니, 주상은 말씀하기를, “그렇다.” 하였다. 하루는 공이 조용히 장계를 올리기를, “성균관(成均館)은 인재를 양육하는 땅 이온데 서적(書籍)이 부족하여 학관(學官)이나 유생(儒生)들이 고열(考閱)하기 어려우니 장서각(藏書閣)을 세우도록 하여 주옵소서.” 하니, 주상은 윤허하여 장서각을 명륜당(明倫堂) 북쪽에 세우도록 명령하여 각이 낙성되자, 내각(內閣)에 수장했던 오경(五經)사서(四書) 각각 10질씩을 내려주고, 또 전교서(典校署)에 유시(諭示)를 내려 8도에 서판(書板)이 있는 곳에 따라 인쇄하고 장황(裝潢)해서 올려 보내게 하니, 이에 경사(經史)제자(諸子)의 잡서가 무려 수만 권에 달하였다. 공은 또 사재를 내어 비용에 보조하니 사림(士林)이 칭찬하였다.
기해년에 명나라에서 장차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할 제 본국에 칙서를 보내어 조력하라 하므로, 어유소(魚有沼)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는데, 때마침 얼음이 합강(合江)되지 아니하였고 눈은 쌓이고 길은 험하여 행군(行軍)을 파하고 돌아오니 공은 장계하기를, “본국이 조종(祖宗) 이래로 지성껏 대국을 섬겼고, 중국도 또한 우리를 외대(外待)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는다면, 한 갓 번병(藩屛)의 방어하고 호위하는 의무를 상실할 뿐 아니오라 중국에서 뒷공론이 있을까 저허하옵니다. 신은 원하옵건대 다시 중한 장수를 보내서 출전(出戰)하게 하시옵소서.” 하니, 주상은 여러 신하에게 하명하여 의논하게 한 바 모두가, “두 번째 거병(擧兵)하는 것은 불가하옵니다.” 하되, 공은 그러면 안 된다고 고집하며 아뢰기를, “의자(議者)의 논은 자신이 편안하자는 계책이요, 노신(老臣)의 중히 여기는 것은 국가의 대체이온즉 당연히 성낼 만 한 대상이 되면 급히 가서 쳐야하는 것이오니 늦추어서는 아니되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는 유의하시옵소서.” 하였다. 드디어 우의정 윤필상(尹弼商)에게 명령하여 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오니 주상은 공에게 이르기를, “경의 계책을 들어서 두 번째 거병하여 성공했으니 나는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하고, 후한 상을 주었다. 경자년에 왕비 책봉과 궁각(弓角)에 관한 일로써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착실하게 보고하니 황제는 위로하여 말하기를, “노한(老韓)은 충성하고 정직한 선비다.” 하고, 아뢰는 대로 모두 허락하였다.
계묘년 봄에 세자 책봉을 청하기 위하여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는데, 이 해에 공의 나이가 69세로 만리의 길을 떠나게 되니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다. 공은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되어 중한 은혜를 입고 후한 녹을 먹으면 비록 왕사(王事)에 죽어 말가죽에 시체가 쌓이더라도 오히려 사양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조회하고 관광(觀光)하는 일에 있어서랴.” 하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이에 주상은 사정전(思政殿)에 납시어 전송하였다. 서울에 당도하니 황제는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충직한 노한이 또 왔구나.” 하며, 서대(犀帶)ㆍ채단(綵段)ㆍ백금(白金)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갈 적에 중사(中使)를 보내어 통주(通州)까지 전송하게 하였으니, 황제의 은총이 이처럼 지중하기는 전고에 없던 일이었다. 공이 일찍이 장계하기를, “조종(祖宗)의 조정에서 강을 따라 아래위로 장성을 쌓다가 공력이 워낙 많이 들어서 끝을 맺지 못했으니, 신의 생각에는 마땅히 다시 수축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주상은 좌의정(左議政) 홍응(洪應)을 보내어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가을에 늙음으로써 사직하기를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아니하고 어찰(御札)을 내려 이르기를, “공훈은 여러 대에 으뜸이요, 재식(才識)은 한 세상을 올렸으며 한 마음으로 임금을 섬기고 여러모로 나라를 근심하며 의논은 근거가 있고 언어를 증험해 보면 반드시 적중하며, 원로(元老)가 조정에 있는 것은 나라의 영화요, 고굉(股肱)의 선력(宣力)은 임금의 의뢰(依賴)다. 병에 걸린 적이 비록 오래지만 약을 내려준 것도 또한 많으니, 부디 조양하여 그리는 회포에 부응하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한다면 경(卿)은 노퇴(老退)를 고한 편안함이 있을 것이요, 나도 구신(舊臣)을 버린 과실을 면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갑진년 봄에 나이 70세가 되어 치사 퇴직하기를 간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궤장(?杖)을 내려주었다. 을사년 봄에 풍덕(豊德) 별장[村莊]에 가서 휴양[休浴]하니 주상은 중사(中使 내관)에게 술과 찬수를 보내어 위로하고 따라서 어찰(御札)을 내렸는데 그에, “경(卿)은 국가의 원훈(元勳)이요, 사람 중에 기덕(耆德)이다. 사직(社稷)에 있어서는 이미 하늘을 떠받든 기둥과 같고 내게 있어서는 실로 염매(鹽梅)를 힘입는다.” 는 말이 있었다. 정미년에 또 풍덕에서 휴양하니 어찰을 내려 위로하기를 역시 그 전과 같이 하였다. 겨울에 병이 드니 주상은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날마다 내관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병이 위독하게 되자 주상은 승지(承旨)를 보내어 하고파 하는 말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백왕(百王)을 뛰어나셨는데 신 같은 우매한 몸이 어찌 아뢸 말씀이 있겠는가. 다만 몸이 먼저 아침 이슬같이 사라져서 영원히 밝은 세대를 하직하게 되니 오직 이것이 섭섭할 뿐이다.” 하였다. 잇달아 내관을 보내어 물을 적에 공이 눈을 감고 명이 끊어지려 하다가 내관이 왔단 말을 듣고 관대(冠帶)를 몸에 얹게 하며 목구멍 속으로 말하기를, “성명(聖明)께서 지극하시옵니다. 그러하오나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오니 원하옵건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시옵소서.” 하고, 말을 마치자 절명하니 수는 73세였다. 주상은 심히 슬퍼하시어 감선(減膳)하고 철조(撤朝)하며 내관을 보내어 조위(弔慰)하기를, “경은 공과 덕이 세상을 뒤덮었으니 다른 신하에게 비할 바 아니요, 하물며 과인(寡人)에게는 의가 한 집안과 같으니, 원통하고 슬픈 마음이야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부의와 치제(致祭)를 내리되 상례보다 더하고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회장(會葬)하게 하였다. 공이 돌아갔다는 소문이 들리자 원근을 막론하고 슬퍼하지 않은 자가 없으며 우동(牛童)과 마졸(馬卒)까지도 역시 모두 탄식하며 애석히 여겼다.
공은 기우(氣宇)가 관홍(寬弘)하고 사려(思慮)가 심원(深遠)하며 얼굴이 잘나고 키가 커서 바라보면 위대하였고, 출세하기 전에는 호걸(豪傑)들과 사귐을 맺으며 규모와 기개가 우뚝하여 무리에서 돋보이니 사람들이 모두 공보(公輔 재상)의 자격으로 기대하였고 오랫동안 하관(下官)으로 있었으나 스스로 즐겁게 여겼다. 세조를 만나게 되어서는 고굉(股肱)과 심려(心?)가 되어 산가지를 돌리고 계책을 결단하여 큰 난을 평정하였으며, 포의(布衣) 시절로부터 몇 해가 못가서 재보(宰輔)의 지위에 이르렀고, 대사를 의논하고 결단함에 있어서도 여유가 작작하였고, 정사는 대체를 힘쓰며 세미한 것을 일삼지 아니하고, 세 조정을 내리 섬기어 나아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정승이 되고, 인각(麟閣)에 으뜸이 되어 공은 백대에 드높고 다섯 번 조정의 장이 되어 명망이 한 세상을 덮었으며, 더구나 척리(戚里)의 친(親)으로 두 번 국구(國舅 부원군)가 되었으나 공이 이뤄져도 자신이 차지하지 아니하고 지위는 높아 갈수록 마음을 근신하며,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어 국가의 안위(安危)가 한 몸에 매인 적이 30여 년이었으니, 공명과 부귀와 복리(福利)의 거룩함이 고금에 짝이 없었다. 만년(晩年)에 성하고 가득함을 스스로 경계하여 정자를 성 남쪽에 지어 편액을 압구정(狎鷗亭)이라 하고 걸해(乞骸)하고자 하여 노퇴(老退)를 고하니, 주상께서도 근체시(近體詩)절구(絶句)를 지어주신 것이 또 한두 번 인지라. 규벽(奎璧)이 찬란하여 정액(亭額)이 빛을 더하고 조신(朝臣)으로 응제(應製)한 자가 무려 60여 명이며, 중국의 군사들 또한 제영(題詠)한 자가 많았다. 주상의 은권(恩眷)이 나날이 더하여 끝끝내 걸퇴(乞退)의 뜻을 들어주지 아니하니, 공은 총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위태함을 생각하여 능히 시종(始終)을 온전히 하였다. 지난날에 구하여도 그 짝이 있을까 싶지 않으니 아, 거룩하도다.
관의 배위(配位)는 황려부부인(黃驪府夫人) 민씨(閔氏)요, 증우의정(贈右議政) 대생(大生)의 따님이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보(?)인데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해서 낭성군(琅城君)을 봉하였으며, 큰 딸은 봉례(奉禮) 신주(申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영천군(鈴川君) 윤반(尹磻)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장순왕후(章順王后)로서 공릉(恭陵)에 장사하고 다음은 공혜왕후(恭惠王后)로서 순릉(順陵)에 장사하였는데, 이 두 분은 모두 일찍 승하하였다. 또 부실(副室)에서 7남 6녀를 낳았다. 낭성군은 좌참찬(左參?) 이훈(李塤)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으니 큰 아들은 경기(景琦)요, 딸은 이광(李光)에게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봉례(奉禮) 신주(申澍)가 3남을 낳으니 종흡(從洽)은 군기첨정(軍器僉正)이요, 종옥(從沃)은 호조정랑(戶曹正郞)이요, 종호(從濩)는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이라. 영천군 윤반(尹磻)이 2남 5녀를 낳으니, 아들은 수강(秀岡) 수륜(秀崙)이요, 큰 딸은 홍의손(洪義孫)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이수량(李守諒)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문미수(文眉壽)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양숙(梁淑)에게 출가하였다. 공릉(恭陵)은 인성대군(仁城大君)을 탄생하였다.
무신년 정월 병오일에 청주(淸州) 장명리(長命里)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벌에 장사하였다. 장사가 끝나자 낭성이 행장을 갖추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청해왔다. 아, 거정이 차마 명을 짓는단 말이냐. 거정이 나이 20세 전에 태재(泰齋) 유선생(柳先生)을 북원(北原)에서 뵙고 그 문하에서 수업하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공은 길창(吉昌)과 더불어 뒤늦게 와서 함께 거처하며 토론하고 확정[商確]하여 수년을 지나는 동안에 드디어 망년(忘年)의 교분을 맺었었다. 거정은 요행히 제일 먼저 과거에 합격하고 공과 길창은 오래 굴(屈)하여 펴지 못하더니, 두 공은 함께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지위가 재상에 오르고 거정은 단졸(短拙)하여 떨치지 못하다가 두 공의 이끌어 줌을 얻어 오늘날까지 이르러왔다. 길창은 일찍 작고하였으니 세한(歲寒)의 사귐은 오직 나와 더불어 두 사람 뿐이다. 공이 평소에 항시 후사(後事)를 거정에게 부탁하였는데, 지금은 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부러졌으니 다시 우러를 곳이 없다. 대강 공의 평생의 공덕에 대한 시종을 기술하여 명(銘)을 하고 눈물로써 이으노니, 아, 슬프다. 명에 이르기를,
천지의 정영(精英)이요
산하(山河)의 간기(間氣)로세
세상에 드문 재주요
나라를 경륜할 그릇이네
불우한 옛날은
동산(東山)의 뜻일러라
때를 맞춰 굴신(屈伸)한 것은
남양(南陽)의 용(龍)이구려
세조(世祖)의 지우(知遇)야 말로
천년에 드문 제회(際會)로세
산가지[籌]를 돌려 꾀를 결정하니
큰 업이 이뤄졌도다
하늘을 고이고 해를 꿴 듯
밝고 밝은 그 충성이여
태산이 숫돌 되고 황하가 띠 되도록
공훈이 길이 빛나리라
깊고 깊은 상부(相府)와
높고 높은 인각(麟閣)에
나가면 장수 들어오면 정승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도다
한 몸에 안위(安危)를 짊어지고
휴척(休戚)을 같이 하였네
나이 칠순이 넘도록
복을 누려 다함이 없도다
노국(潞國 문언박(文彦博))과 백중(伯仲)이 되고
분양(汾陽 곽자의(郭子儀))과 시종(始終)이 같네
하늘이 갑자기 빼앗아
일감(一鑑)이 없어졌구려
사람은 비록 없어졌지만
썩지 않는 것이 여기 있네
덕을 힘쓰고 공을 힘쓰니
충성하고 부지런한 것
그 미덕(美德) 뉘 들추는고
빛나고 빛난 역사가 있네
저 서원(西原)을 쳐다보니
바로 공의 묘이로세
하늘이 상서를 내리어
자손들이 창성하구려
혹시나 못 믿거들랑
나의 명(銘)을 볼지어다


[주D-001]연릉(延陵) : 계찰(季札)을 말한 것이다. 계찰은 춘추(春秋) 시대 오왕(吳王) 수몽(壽夢)의 작은 아들인데 어진 이름이 있었다. 그리하여 수몽은 계찰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그 형에게 사양하나 받지 아니하였음.
[주D-002]휴양[休浴] : 휴식하고 목욕한다는 말이다.《한서》 곽광전(?光傳)에, “곽광이 때마침 휴욕하기 위하여 외출하였다[光時休浴出].” 하였다. 요즘 일요일에 같은 말이다.
[주D-003]염매(鹽梅) : 소금은 맛이 짜고 매실은 맛이 시니 국물을 만드는 필수품이다. 《서경》 열명(說明)에 “만약 국물을 조미(調味)할 경우에는 네가 염매(鹽梅)의 구실을 하라.” 하였다. 이것은 은고종(殷高宗)이 부열(傅說)을 명하여 정승을 삼을 때의 말이므로 후에 정승이 된 자의 업적을 칭찬하는 말로 쓰고 있다.
[주D-004]동산(東山) : 진(晋) 나라 사안(謝安)이 처음에 동산(東山)에서 은거하다가 뒤에 조정에 들어와서 벼슬이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세상에서 은거하다 다시 나온 사람을 동산재기(東山再起)라 칭한다.
[주D-005]남양(南陽)의 용 : 한(漢)나라 제갈량(諸葛亮)을 말한 것이다. 제갈량이 남양(南陽)의 초당에 은거하였고, 도호(道號)는 와룡(臥龍)이므로 남양룡이라 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