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이개 ▒

한산(李韓山 이개(李塏)) 같은 이들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장유(張維)-

천하한량 2007. 4. 6. 01:59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잡저(雜著) 76수
 
 
비해당 묵묘신상권 뒤에 쓰다[書匪懈堂墨妙神賞卷後]


이것은 예(倪)ㆍ마(馬) 두 조사(詔使)가 비해당(匪懈堂)에게 시를 증정하며 그 필적(筆跡)을 찬양한 것과 당시의 명인(名人)들이 지은 시와 문 약간 편(篇)을 잇따라 묶어 한 축(軸)으로 만든 것이다. 동양도위(東陽都尉) 신군석(申君奭 신익성(申翊聖))씨가 가지고 와서 보여 주기에 내가 열람하였는데 다 보고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감탄하며 말하기를 ‘너무나도 훌륭하여 그야말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보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은(殷) 나라의 상법(常法)이나 하(夏) 나라의 구정(九鼎)으로도 그 예스러움을 비유하기에 부족하고, 초(楚) 나라의 옥돌이나 수후(隋侯)의 구슬로도 그 보배스러움을 견주기에 부족하다.’ 하였다.
대체로 이 두루마리 속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건대 특이하게 빼어난 점으로 네 가지를 들 수가 있다. 예로부터 서법(書法)에 능하다고 일컬어진 자를 보면 위로는 종왕(鍾王 위(魏) 나라 종요(鍾繇)와 진(晉) 나라 왕희지(王羲之))으로부터 아래로 백기(伯機 원(元) 나라 선우추(鮮于樞))와 자앙(子昻 원 나라 조맹부(趙孟?))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서생(書生)으로서 고심(苦心)한 끝에 그런 경지를 얻은 것이었고, 호귀(豪貴)한 환경에서 생장한 자의 경우는 서법에 이름을 걸고 온통 그쪽에 정력을 쏟는다 하더라도 묘경(妙境)에 제대로 나아간 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오직 비해당으로 말하면 존귀(尊貴)하기만 한 출신으로서 왕자로 태어나 대군(大君)의 생활을 영위하였는데도 젊은 나이에 절묘한 서예의 경지를 보여 주며 천하에 독보적(獨步的)인 존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첫 번째 특이한 점이다.
서법은 원래 능통하기도 어렵지만 알아보기도 쉽지 않은 법이다. 옛날 위 문정(魏文貞 당(唐) 나라 위징(魏徵))이 문황(文皇 당 태종(唐太宗))의 글씨를 보고서 우세남(虞世南)이 쓴 과법(戈法)이라는 것을 알아챘는데, 이 경우는 유심히 살펴보고서 인지한 것인데도 오히려 감식안(鑑識眼)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그런데 예 내한(倪內翰)은 한 번 슬쩍 눈을 지나치는 사이에 장난삼아 쓴 세 글자를 보고 서법이 묘경(妙境)에 이르렀다는 것을 훤히 알았으니, 이 감식안이야말로 천고(千古)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특이한 점이다.
해외(海外)의 기예에 훌륭한 것이 하나 있다 하더라도 중조(中朝)의 학사(學士)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만도 이미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더구나 존엄한 천자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천자에게 알려지기만 해도 벌써 큰 행운이라 할 것인데, 더더군다나 아주 특별한 상을 내린 위에 이를 새겨 천하에 보여 주도록까지 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는 참으로 지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서 우리나라에 있어 전례없는 영광이요 은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 번째 특이한 점이다.


영묘(英廟 세종)께서 이를 듣고 기뻐하신 나머지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이 일을 노래로 서술하게 하였으니, 지금 이 두루마리 속에 보이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훈업(勳業)을 이룬 김 절재(金節齋 김종서(金宗瑞))ㆍ하 진산(河晉山 하륜(河崙))ㆍ신 고령(申高靈 신숙주(申叔舟))ㆍ정 하동(鄭河東 정인지(鄭麟趾)) 같은 이들, 문장(文章)으로 이름난 서 달성(徐達城 서거정(徐居正))ㆍ최 영성(崔寧城 최항(崔恒)) 같은 이들, 절의(節義)를 세운 성 창녕(成昌寧 성삼문(成三問))ㆍ박 평양(朴平陽 박팽년(朴彭年))ㆍ이 한산(李韓山 이개(李塏)) 같은 이들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제공(諸公)이 처신한 것은 비록 같지 않다 하더라도 요컨대는 모두가 한 시대의 영걸(英傑)들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이 뚜렷이 부각되는 면에 초점을 맞추어 본다면 일월(日月)과도 빛을 다툴 만하니, 백대(百代)의 세월이 흐른다 한들 이와 같은 인물들을 다시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들의 이름이 잇따라 등장하고 그들의 수적(手跡)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흰 비단폭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 두루마리를 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외경심(畏敬心)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네 번째 특이한 점이다.


나름대로 생각해 보건대 아조(我朝)에 있어서 바로 이때야말로 문채(文采)가 빛나며 태평(太平)을 구가하던 전성기였다고 할 것이다. 세묘(世廟 세종)께서 신령스럽고 거룩한 자질을 지니시고 위에 임하고 계신 상황에서 궁정(宮庭) 안에는 비해(匪懈)와 같은 아들이 있었고 조정 반열에는 제공(諸公)과 같은 신하들이 늘어서 있었기에 필묵(筆墨)으로 유희(游戱)하는 즈음에서조차 화하(華夏 중화(中華) 즉 중국)에 빛을 뿌리며 온 누리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 어찌 성대한 일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배로 여겨지는 묵적(墨跡)이 천하에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네 가지나 특이한 점을 갖고 있는 묵적은 온 세상을 찾아 보아도 얻기가 어려울 것인데, 말학(末學) 추생(?生)이 또한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운이라 하겠는가. 두루마리 첫머리에 ‘비해당 묵묘신상권(匪懈堂墨妙神賞卷)’이라 표기하고 이렇게 써서 돌려주는 바이다.


[주C-001]비해당 : 세종 대왕의 3남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의 호(號)이다. 당대의 명필(名筆)로서 시문(詩文)에 뛰어나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 가곤 하였다. 단종(端宗) 즉위 후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 등과 제휴하고 문신들을 포섭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의 무신측과 맞서다 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몰락하여 사사(賜死)되었다.
[주D-001]예(倪)ㆍ마(馬) 두 조사(詔使) : 세종 32년 명 경제(明景帝) 등극의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한림원 시강(翰林院侍講) 예겸(倪謙)과 공과 급사중(工科給事中) 사마순(司馬恂)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4 문예전고(文藝典故) 필법편(筆法篇)에 “예겸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흠모하여 말하기를 ‘지금 진 학사(陳學士)가 글씨를 잘 써서 중국에서 명예를 독차지하고 있으나 이 왕자(王子)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하고 더욱 예대(禮待)하면서 글씨를 받아 갔다. 그 뒤에 우리나라 사람이 중국에서 훌륭한 글씨라고 하여 사 가지고 오면 그것이 안평의 수적(手跡)이었으므로 안평이 크게 기뻐하여 만족하게 여겼다.” 하였다.
[주D-002]초(楚) 나라의 …… 구슬 : 모두 천하의 지보(至寶)이다. 초 나라 변화(卞和)가 초산(楚山)에서 옥돌을 얻어 인정을 받지 못한 채 형벌을 받고 두 발을 잘렸다가 뒤에 보옥(寶玉)임을 인정받았던 고사와, 《韓非子 和氏》 수후(隋侯)가 다친 뱀을 치료해 주자 그 뱀이 밤중에 큰 구슬을 물고 와 은덕을 갚았다는 고사가 있다. 《莊子 讓王 疏》
[주D-003]위 문정(魏文貞)이 …… 알아챘는데 : 당 태종이 우세남에게서 서예를 배웠는데 과각(戈脚 우향(右向)으로 비스듬히 갈고리처럼 끝맺는 서법)이 잘 안 되었다. 그래서 우연히 진(?)이라는 글자를 쓰면서 과(戈)는 비워둔 채 우세남으로 하여금 채워 넣게 한 뒤 위징에게 보여 주었는데, 이때 위징이 말하기를 “지금 세상의 작품을 보건대 오직 진(?) 글자의 과법(戈法)이 핍진(逼眞)하게 되었다.”고 하자 태종이 그 뛰어난 감식안에 탄복하였다 한다. 《宣和書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