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장성현 백암사 쌍계루기(長城縣白巖寺雙溪樓記)
삼중대광(三重大匡) □군 운암(雲菴) 징공(澄公) 청수(淸?) 절간(絶磵) 윤공(倫公)에 부탁하여 쌍계루(雙溪樓)의 이름을 짓고, 또 삼봉 정씨(三峯鄭氏)가 지은 누기(樓記)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는데, 백암사의 내력은 자세하나 쌍계가 쌍계로 된 내력과 쌍계루가 쌍계루로 된 내력은 모두 생략되어 써 있지 아니하였다. 아마 그 이름을 명명(命名)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듯 싶다.
이렇게 되어 한번 구경하기로 작정하여 절간공(絶磵公)을 따라 절을 찾았다. 절은 두 물 사이에 있었고, 물은 절을 일으킨 윗목에서 합쳤는데 동쪽은 근원이 가까웠고 서쪽은 근원이 멀기 때문에 수세가 크고 작고 하였다. 그러나 합하여 못을 이룬 뒤에 산을 빠져 흘러 내려갔다. 절 사면을 둘러 있는 산은 모두 높고 가팔라 한여름 6월 더위에도 바람을 쏘이고 땀을 들일 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두 물이 합치는 곳에다 쌍계루를 세웠다. 왼쪽 물위에 걸터앉아 바른쪽 물을 굽어보면 다락의 그림자와 물빛이 아래위에 서로 비치어 참으로 볼만 하였다.
경술년 여름에 큰물이 나서 돌축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누(樓)도 무너져버렸다. 청수옹(淸?翁)은 이 누를 중수하고 쌍계루 기를 지어달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쌍계루는 우리 스승님이 세운 것인데 이처럼 무너져도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스승님은 스승을 이어받기 오대(五代)나 되었으므로 절에 뜻을 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그런 누가 지금 없어졌으니 그 책임을 어디로 돌려야 할 일입니까. 그래서 부랴부랴 날을 다투어 공사를 끝내고 옛 모습대로 다시 세우자 썩었던 재목이 견고하여지고 알 수 없게 되었던 채색이 선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서야 족히 스스로 위안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우리 스승님의 마음을 타락시키는 점이 있지 아니한가 두려워함이 있음을 내 제자들이 반드시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내 제자로서 나를 따라 이 절에 머물러 있는 자가 나의 이 마음을 못 알아본다면, 절 일은 지탱되지 못할 것이니 누(樓)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불상에 먼지가 끼고 지붕에 비바람이 들이치게 되어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누 하나쯤 재건한 것으로써, 글로 쓸 만한 것이 못 된다 하더라도 꼭 글 잘하는 분을 구하여 써주기를 청하는 것은 오래도록 전하기를 꾀하기 때문이요, 나아가서는 나의 후배를 경계하기 위한 까닭이니, 사양하지 마시고 써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내 일찍이 행촌(杏村)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모셨고, 그 자질(子姪)과 같이 공부하였는데 선생은 그 계씨(季氏)다. 여러번 써드린다는 약속을 어겨 왔으므로 이제 절간공(絶磵公)의 말을 인용하여 이름을 ‘쌍계루’라 하고 기를 지어 보낸다. “아, 내가 늙었구나. 명월이 누에 가득 찼으련만 하룻밤 그곳에서 구경할 길 없으니, 젊어서 길손되지 못한 것을 한할 뿐이로다.” 하고는, 그 사제(師弟)의 이어받은 계통은 자세하게 절 문서에 기재되어 있기에 여기에는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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