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육우당 기(六友堂記)
영가(永嘉) 김경지(金敬之)는 강절(姜節)선생의 눈ㆍ달ㆍ바람ㆍ꽃이란 것을 취하여 그 집을 사우당(四友堂)이라는 이름하고는, 나에게 그 뜻을 해설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나는 원래 강절을 배우기를 원하지도 않은 데다가, 또한 겨를조차 없어 오랫동안 응해 주지 못하였더니, 그가 여흥(驪興)에 살면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우리 모친의 집에 있는데, 강(江)과 산(山)의 좋은 경치가 조석으로 나를 위안하여, 눈ㆍ달ㆍ바람ㆍ꽃의 사우(四友)만이 아니오라, 강과 산을 더하여 육우(六友)라고 하였으니 해설하여 가르쳐 주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나는 쇠하고 병든지 오래되어 천시(天時)가 위에서 변하는데도 나는 몽매하게 알지 못하고 지리(地理)가 아래에서 변하는데도 나는 어두워 느끼지 못할 뿐인데, 강절의 학설은 상수(象數 천지의 운행과 만물의 형상)에 밝다. 지금 비록 강과 산을 눈ㆍ달ㆍ바람ㆍ꽃의 4가지에 더하여 강절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였으되,《주역(周易)》의 육룡(六龍)과 육허(六虛)에서 강절의 학설이 나온 바이니 그대의 육우(六友)란 것도 상수(象數)의 학설과 같을 뿐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미 강절의 학설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상수 밖의 학설인들 말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산은 우리 어진 이의 즐겨하는 것이라 산을 보면 나도 어질어[仁]지고, 물은 우리 지혜로운 이의 즐겨하는 것이라 강을 보면 나도 지혜로워 진다. 눈이 추위를 덮어 따뜻해지니 나의 기운을 적중하게 보존해 주는 것이요, 달이 밤에 나와 밝으니 나의 몸을 편안하게 보존하는 것이로다. 바람이 팔방(八方)에서 각각 때를 따라 이르니 내가 망녕되지 않게 하는 것이요, 꽃이 사시(四時)로 각각 종류대로 모이게 되니, 나의 차례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로다. 하물며 경지(敬之)는 가슴속이 맑아 한점의 티끌이나 찌거기도 없고, 또 그가 사는 곳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아 밝은 거울이나 비단 병풍과 같다고 일컬어지는 곳이다. 눈은 외로운 배 위의 도롱이와 삿갓에 덮인 것이 더욱 아름답고, 달은 높은 다락과 술잔에 비춘 것이 더욱 아름답도다. 바람은 낚싯줄에 부니 더욱 맑고, 꽃이 책장[書函] 위에 있으니 그윽한 것이 더욱 그윽하도다. 4가지로 사시(四時)의 경지가 각각 더욱 지극한데 강산(江山)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도다. 경지는 어버이를 모시는 여가에 강물에 배 띄우고 산에는 나막신으로 올라, 맑은 바람 앞에 서서 떨어진 꽃잎을 헤아리도다. 눈을 밟아서 중을 찾고 달을 대하여 손[客]을 청하니 사시로 즐거움이 역시 지극하도다. 경지(敬之)는 아마 한 세상에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난 재주이리라. 그러나 벗이란 것은 뜻이 같은 것이니 멀리 옛 사람을 벗하려면 옛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요, 지금 사람을 벗하려면 나와 같은 무리가 어찌 적으리오? 그러나 경지는 강ㆍ산ㆍ눈ㆍ달ㆍ바람ㆍ꽃 여섯 벗[六友]만이 있으니, 경지는 아마 한 세상에 남이 따를 수 없는 뛰어난 재주로다. 천지는 부모와 같고 만물은 나의 동류(同類)이니, 어디로 간들 나의 벗이 아닐까보냐. 또한 하물며 대축(大畜) 괘(卦)의 산(山)과 습감(習坎)의 수(水)를 강론하여 많이 익힌다면 진실로 나의 벗일 것이로다. 이로써 육우당(六友堂)의 기(記)를 짓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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