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징천헌기(澄泉軒記)
철수좌(澈首座)는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을 뵙고 그를 따라 공부함이 오래되었는데, 그는 철수좌의 호를 ‘징천(澄泉)’이라 지어주었다. 얼마 안 되어 나옹이 세상을 떠남에 슬픈 마음과 사모하는 정이 날이 갈수록 더하여지게 되자 말하기를, “옹은 저 세상으로 멀리 떠나시어 그 모습을 다시 보일 수 없으나, 또랑또랑한 목소리의 감촉은 아직도 제 마음에 가장 깊이 자리잡았고 제 몸에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 이름과 서로 짝이 되어 다함이 없을 것은, 옹이 지어주신 징천이라는 호입니다. 이제 또 제가 거처하는 추녀 끝에 글을 써 달기를 징천이라 함은 대체로 마음에 담아 달고, 눈으로 볼 때마다 생각하여 잠시라도 나옹을 잊어버리지 않으려 함에서입니다. 제 마음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제가 징천임을 알 것이요, 제 마음을 모르는 사람도 저 추녀 끝의 글을 보면 제가 징천임을 알 것입니다. 선생의 한 말씀을 얻어서 징천헌기로 하고자 합니다.” 하기로, 나는 “내 아직 석가의 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잠깐 유자(儒者)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추(鄒) 나라의 맹자가 말하기를, ‘근원이 있는 물이 콸콸 솟아나와 밤낮을 쉬지 않기에 웅덩이가 넘쳐 흘러 사해(四海)로 이른다. 근본이 있는 것은 이와 같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 공자의, ‘물이여, 물이여.’라고 물을 보고 감탄한 말에서 나온 것같습니다. 우리 유가가 격물 치지, 성의 정심으로써 제가ㆍ치국ㆍ평천하를 이룩한다면, 석가모니가 맑고 고요한 관념으로써 본원과 자성(自性)의 천진(天眞)함을 보고 부처가 사람을 생사(生死)의 물결에서 건져 적멸로 돌아가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수좌(首座)께서는 세속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또 양식(良識)을 가진 신분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이미 선생의 솜씨를 터득하여 마음과 몸에 베풀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그 사모함이 깊습니다. 사모함이 깊은 까닭으로 취하기를 간절히 함이니, 나옹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한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옹으로부터 얻은 자기의 호를 부르는 자가 많습니다만, 수좌와 같이 옹을 사모하는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하여서 어찌나 기쁜지 그의 청을 받아들여 다시 사양하지 않으나, 다만 병 때문에 곤고함을 겪어 말을 다할 수 없었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뒷날 기회가 닿는다면 산중으로 찾아가 돌곽에 앉아 샘을 희롱하면서 마음을 깨끗이 씻은 다음에, 수좌를 위하여 다시 말을 계속함이 옳게 생각되어 이만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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