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국간 기(菊澗記)
동년(同年)인 병부(兵部) 박재중(朴在中)이 자기가 거처하는 방에 편액을 달았는데 국간(菊澗)이라 하고 나에게 기를 써달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국화는 꽃의 은일한 것이요, 산골짝 물은 물의 그윽한 것인데, 은밀하면 반드시 그윽하고 그윽하면 반드시 은일하다는 것은 대개 그 기상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재중은 나와 함께 이미 벼슬하여 옥당에 들어가 금성(錦省)을 지냈으니, 모든 사대부들이 서로 부러워하는 바가 되어 조금도 사양하지 않으니 어찌 그 은밀한 것을 사모할까 보냐. 재중은 기상이 수려하고 밝으며 기질이 아름답고 밝아서 고상한 뜻과 한가하고 아담한 용태(容態)는 좋은 금(金)과 순수한 옥과 같으며, 빛나는 산과 윤택한 바다와 같으니, 어찌 그 그윽한 것에 가까우리요. 그러나 그의 취하는 바가 이와 같으니 반드시 그 즐겨하는 바를 의심할 수 없다. 대개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가 있는 이는 말을 좋아하는 것은 그 덕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재중이 마음에 얻은 것은 반드시 있는 바가 있을 것이니, 그의 거처하는 방에 표하는 것도 역시 이같이 하지 않을 수 없도다. 재중은 부모에게 효도하되, 부모의 뜻을 봉양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으니 그가 벼슬하는 것도 장차 자기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요, 자기 몸을 영화롭게 하려 함이 아니다. 재중은 그 몸을 닦아 덕을 밝히는 것을 급무로 삼으니 그가 자기 말을 문채나게 하는 것은 장차 그 도(道)를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요, 자기 몸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부모에게 효도할 뿐이나 몸은 은일한 것을 뜻하며, 덕을 밝게 할 뿐이나 몸은 유한(幽閑)한 것을 뜻하니, 공명과 부귀가 그를 더럽히지 못함이 분명하도다. 하루 아침에 때를 만나서 재상의 벼슬에 나가게 되고 다시 옮겨 조아(爪牙)의 군사를 맡게 되면 부모를 봉양하는 뜻을 다할 것이니 어찌 한갓 자기 몸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과 비교가 되랴. 하물며 산에 오르고 물에 임하여 물건을 만나 감회를 일으키면 언덕과 골짜기의 모양과 연기와 안개의 생각을 진실로 가릴 수가 없을 것이니, 스스로 자기 처소에 이와 같이 편액을 쓰는 것이 마땅하도다. 나는 목단(牧丹)에 가깝고 또 황료(潢?)에 가깝다. 이는 부귀를 족히 부끄러워하는 데 하물며 신명(神明)에 어떻게 드리겠으랴. 국간(菊澗)을 쳐다보니 실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비록 그러하나 천지는 본래 한 기운이요, 신하와 초목도 본래 한 기운이니 어찌 그 사이에 경중을 따지랴. 아, 이것은 재중과 더불어 말할 것이로다. 경신년 여름 4월에 쓰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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