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규헌 기(葵軒記)
영가(永嘉) 권희안(權希顔)은 내가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다.
맑으면서도 구차히 남보다 다르게 하지 않았고, 화하면서도 구차히 남과 같으려 하지 않았는데, 조정에 선 지 오래도록 그 뜻을 얻어 베풀지 못했다.
이에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뜻을 취해서 자기 마루에 규헌(葵軒)이라고 써 붙이고 나에게 기(記)를 쓰기를 청하였다.
내 이를 사양하지 못하고 전에 들은 바를 더듬어 다음과 같이 쓴다. 대개 이치란 형상이 없고 물(物)에 붙어 비로소 물의 형상이 되고 이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용도(龍圖)와 귀서(龜書)는 성인들이 법으로 삼는 바이며, 시초(蓍草)가 나와 음양의 기우(奇?)의 변화를 다 궁구하여 만세(萬世)의 물을 열고 일을 이루는 근본이 되었으니, 비록 적은 물건이라도 어찌 이것을 적다고 할 것이랴. 근세의 관매(觀梅)를 점치는 학문도 또한 여기에 근본하여 점차 발전한 것이다. 어찌 이것을 그만 둘 수가 있는가. 이로써 희안의 증대부(曾大父) 문정공(文正公)은 도덕과 문장이 백료의 본보기가 되어 그 거처하는 곳을 국재(菊齋)라 했고, 그의 대부(大父) 창화공(昌和公)은 공명과 부귀가 여러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더니 그 거처하는 곳을 송재(松齋)라고 하였다. 또 그의 아버지는 만호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외척의 세력을 잡아서 숭교리(崇敎理) 연지(蓮池) 옆에 누각을 지어 여기에 운금(雲錦)이라 하되, 그 어버이를 즐겁게 하고 이것이 종족에게까지 미쳐서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이 기까지 지어 주었으니, 실로 장한 일이로다.
이제 희안이 해바라기를 취한 것은 대개 그의 가법(家法)인데, 해바라기의 물건됨은《춘추(春秋)》에도 전해졌고, 속수선생(涑水先生)이 또 이것을 취해다가 시(詩)까지 지었으니, 해바라기가 대접을 받은 것이 크도다.
물과 물에 있는 초목의 꽃이 아주 많지만, 유독 해바라기가 능히 뿌리를 보호할 줄을 아니 이는 슬기가 있음이요, 능히 해를 향하니 이는 충성됨이라, 군자들이 이를 취하는 것이 어찌 부질없는 일이랴. 서리와 이슬이 내려야만 국화는 누르고, 얼음과 눈이 쌓여야만 소나무는 푸르며, 바람과 비가 흩어져야만 연꽃의 향기는 더욱 맑으며, 태양(太陽)이 비쳐야만 해바라기꽃은 기울어지는 것이니, 그 보통의 초목과는 매우 다르도다. 누가 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지 않으리요.
국화는 은일(隱逸)이요, 소나무는 절의(節義)이며, 연꽃은 군자요, 해바라기는 지혜와 충성인데, 이들이 어찌해서 한 집에 모두 모였는가. 할아비와 아들과 손자가 서로 계승하여 세상에 혁혁하고, 물건을 취하여 스스로 자기를 나타냄이 이와 같으니 권씨(權氏)가 보통의 초목들로 더불어 같이 썩지 않을 것이 또한 분명하여 사림에 빛을 드리우고 왕국에 명예를 넓힐 것을 가히 기다릴 만 하니, 청하건대 이를 기억하기 바라노라.
정사년 납월(臘月)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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