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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양헌 기(陽軒記)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4. 4. 02:50


 기(記)
 
 
양헌 기(陽軒記)
 

귀성부원군(龜城府院君) 김공(金公)이 천력황제(天曆皇帝)를 섬겨 규장각에서 글을 읽을 때 우강 게문안공(?江揭文安公)은 당시 강관(講官)이 되었었다.
각하(閣下) 김공은 그를 섬기고 제자로서의 예를 다하여 때로는 그의 집에 가서 깊은 뜻을 질문하되, 경사를 통달하고 시장(詩章)을 익혔는데, 그 뒤에 지정황제(至正皇帝)가 예로써 후히 대접하되 여러 번 천거하여 장패대경(章佩大卿)에 이르러 직책이 임금 가까운 곳에 있게 되었다. 비단옷을 입고 고기음식을 먹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건만 태연히 화려한 일을 버리고 유아(儒雅)한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겨하여, 혹시 좋은 시절과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서로 읊고 노래하며 서로 화답하여 성정을 닦고 길렀으니, 시(詩)의 흥미를 깊게 얻었다 하겠도다.
관사에서 숙직하는 여가에는 매양 부모를 생각하여 임금에게 청하면 임금이 특별히 향을 내리고 역마를 타고 가게 한 적이 두세 번이나 된다. 금강산에 나아가서 성수(聖壽)를 빌기를 마치고, 술을 들어 고당(古堂)에 계신 부모에게 올리면 부모가 즐거워하되 오직 공(公)으로 하여 기뻐하였으니, 가정 안에 화기가 가득하여 사람들이 이것을 지금까지 공의 풍류가 한가롭고 아담함으로 칭송한다. 전배 중에 큰 선비들도 많이 공을 따라 놀았는데, 우리 선군 가정공(稼亭公)도 또한 그 하나이다.
충의(忠義)와 거취(去就)의 큰 절개에 이르러서도 역시 이를 경솔히 여겨 시속을 따르지 않았는데, 현릉(玄陵)의 기축년 굴욕을 당할 때에도 뜻을 지키고 변하지 않아서 진실로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으니, 가히 군자(君子)라 이르겠도다. 이 까닭에 현릉이 사랑하고 중히 여겼으니, 그 글을 읽어 깊은 뜻을 얻었음을 알겠다.
지금 천녕현(川寧縣)에서 사는 데는 산이 있어 오를 만하고 물이 있어 가볼 만한데, 지팡이 짚고 짚신 신고 여기에 왕래하였으니, 또 염동정(廉東亭)의 얻기 어려움이 있도다. 그 일시의 바람과 달을 읊고 천지 사이에 잘난 체하여, 전일의 번화하고 광대한 인물들의 성(盛)하고 읍양하고 주선하는 예법의 아름다움을 모두 생각 밖으로 없애버리고 꿈속에서만 흐릿할뿐 털끝만한 나머지도 없으니, 비록 오수(汚?)의 독락(獨樂)한 것이라도 이보다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시경》에 이른바, “군자는 만족해 한다.”는 것은, 대개 적은 벼슬에 숨어 있는 자를 말함인데, 공(公)은 산이 푸르고 물이 맑은 곳에 숨어 있으니, 그 자취는 다르면서도 마음은 같음이로다. 동정(東亭)이 이미 조정에 돌아오자 나를 볼 때마다 공을 칭찬하여 마지 않았으며, 또 공의 말로써 양헌기(陽軒記)를 쓰라고 하니, 김공(金公)은 부집(父執)이니 우리로도 사양할 수가 없으나, 내 병이 오래 되어 그 뜻을 다하지 못하고 오직 한 마디 말로만 답한다.
양(陽)은 군자요, 음(陰)은 소인이다.《주역(周易)》의 64괘가 모두 양을 붙들고 음을 억제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군자의 도를 길게 함이로다. 성인이 세상에 큰 교훈을 드리움이 이와 같으니, 그 음을 억압하고 소인을 없이함이 깊도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양의 유(類)이요, 슬퍼하고 싫어함은 음의 유이니, 내가 아는 바를 말해 보겠다.
병을 앓고 난 뒤에 늦게 일어나 처마 밑에서 볕을 쬐고 몸을 펴서 기운을 차려 걸으면, 정신이 맑고 뜻이 굳어져서 그 즐거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있을 것이니, 일찍이 옛사람이 임금에게 헌신(獻身)한다는 말로써 스스로 징험해 보면 진실로 맛이 있었는데, 더욱이 지금 요동(遼東) 고새(故塞 현 평북(平北) 박천(博川))에는 여름에도 눈이 내리니, 김공(金公)의 임금께 헌신하기로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날에나 그치겠는가. 아깝도다. 내 털도 반넘어 희어졌는데 하물며 공이겠느냐. 청하건대, “이 말로 답하는[塞責]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동정(東亭)이 말하기를, “옳도다. 그칠지어다.” 하기에 드디어 이것을 써서 기(記)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