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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오관산 흥성사전 장법회 기(五冠山興聖寺轉藏法會記)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4. 4. 02:36

기(記)
 
 
오관산 흥성사전 장법회 기(五冠山興聖寺轉藏法會記)
 

경성(京城) 간방(艮方) 모퉁이와 천마산(天魔山) 손방(巽方)과 고암(鼓巖) 태방(兌方)에 5봉우리가 있는데, 이들이 모여 서로 포위하고 있어서 바라다보면 하나와 같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름하여 오관(五冠)이라 했는데, 이것은 그 형상을 취한 것이요, 또 그 기이한 경치가 족히 삼한(三韓)의 모든 산보다 제일 좋기 때문이다.
정화공주(貞和公主)의 아버지는 이름을 보육(寶育)이라 하는데 이가 실상 여기에 살았고, 우리 태조(太祖)의 증조 작제(作帝) 건(建)의 외대부(外大夫)로서 태조가 사삿집을 화하여 나라로 삼고 집을 버려 절로 삼아 이름을 숭복(崇福)이라 했으니, 그 편액만 보아도 가히 알 수가 있다.
그 뒤 난리에 불타버린 뒤로 일찍이 개수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더니, 경효대왕(敬孝大王)께서 추원(追遠)하는 데에 뜻을 두어 조종조(祖宗朝)가 세운 법도를 모두 닦고 밝게 했다. 심지어 사원에 이르기까지 옛 것을 완전히 하고 새로운 것을 더하여 달과 같이 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이에 말하기를, “이는 정화(貞和)가 사는 곳이니 후비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하라.” 하였다. 이 까닭에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스스로 공덕주(功德主)가 되어 옥우(屋宇)와 전량(錢糧)을 모두 새롭게 하고, 모두 넉넉히 하여 대장함장(大藏函藏)의 표지를 만들어 질서 있고 빛나게 하였는데 얼마 안되어 공주가 훙(薨)하자, 또 공주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상을 모셔 시절을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현릉(玄陵)이 세상을 떠나고도 더욱 풍부하게 하고 쇠폐함이 없어 울연(蔚然)히 대총림(大叢林)을 이루었다.
지금 주지 대선사의 이름은 내명(乃明)인데, 곧 조계(曺溪)의 원로이다. 시자(侍者) 불혜(佛惠)를 보내어 기를 구하기를, “이 절은 노국(魯國)이 와 있은 지가 이미 3번인바 그 공덕이 지난날의 일보다 나았음을 입으로 말하기를 어려우므로, 장차 이 현판을 써서 걸고 앞으로 오는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니, 그대는 붓을 들어 운수승(雲水僧)과 함께 글을 짓기를 조금도 아끼지 말아 주시오. 더욱이 선왕(先王)의 은혜를 입음이 적지 않아 반드시 즐거이 기를 쓸 것이므로, 내 몸소 나가 청하지는 않았으며, 예에는 박하고 그 구하는 것은 많지만 역시 선왕의 위령(威靈)을 받드는 그대의 추모하는 마음이 도타운 까닭에 반드시 사양하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내명대사는 나이 지금 67세로서 이 절의 주지로 있은지 11년이라 하니, 선왕(先王)의 지우를 받음이 또한 얕지 않았으므로, 조석으로 향을 피워 선왕과 노국(魯國)과 노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추모하여 지나간 허물을 씻고, 앞으로 올 길(吉)함을 맞아서 이를 점치지 않아도 가히 알 수 있었으니, 이는 선왕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제 조석(朝夕)의 신하로 하여금 모두 내명대사와 같이 선왕을 저버리지 않게 한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밤낮으로 이렇게 되기를 바라며 이에 기를 쓰노라” 하였다. 무오년정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