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천보산 회암사 수조 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
회암사 주지(檜巖寺住持) 윤절간(倫絶磵)이 일찍이 색(穡)에게 말하기를, “보제(普濟)가 이미 죽자 중들이 명(銘)을 쓰고 비석을 세웠으니, 이 절을 세운 것도 마땅히 그 시말을 기록해서 보제가 구구하게 이 절을 위한 무궁한 뜻을 들어내 주어야 할 것인데, 이 때문에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므로 부디 사양하지 마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리 하겠습니다.” 하였더니,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문인 각전(覺田)이 또 와서 말하기를, “우리 스승은 이미 죽었고, 우리 무리들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 갔는데 절이 전일 같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아, 슬프외다. 우리 스승의 도(道)는 세상에서 능히 소중히 여겨야 하고 가볍게 여기지 못할 바입니다. 그러나 절이 흥하고 망하는 것은 뒷 사람에게 있는 것이요, 우리들의 능히 잘하고 못하는 데 있는 것인데, 또한 이것을 먼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 슬프외다. 우리 스승이 여기에 역사를 시작하여 그 지획(指?)한 곳과 좌립(坐立)한 곳이 모두 전일과 같으며, 음성과 용모의 막연함과 우리 스승이 여기에서 법을 펴셔서 그 축도(祝禱)하는 규모와 봉갈(棒喝)하는 풍도도 전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위의(威儀)와 호령(號令)의 삭막(索漠)함과 원우(院宇)의 적막함과 향화(香火)의 소조(蕭條)함과 강월(江月)의 경계는 평평하게 들 안개에 잠겨졌습니다. 비록 그러하나, 불성(佛性)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요, 후생(後生)이 가히 두려운지라, 어찌 이 다음날에 전보다 나은 일이 있을지 알겠습니까. 이것으로 우리들이 스스로 위로하는 바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이 절은 앞에는 철산(鐵山)이 편액을 썼고 뒤에는 지공(指空)이 땅을 잡아서 그 산수의 형상이 완연히 서축(西竺) 난타사(蘭陀寺)와 같은데, 이는 또한 지공이 스스로 말한 것이라, 그 곳이 복지(福地)가 됨이 분명합니다. 후세 사람들이 혹시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이것을 새로 지었다고 하여 헐어 없앤다면 보제(普濟)의 문인이, 몸소 실천한 아름다움을 이룬 뜻이 사라져 버리고 전하지 못할 터이니 이것을 내가 깊이 슬퍼합니다. 이에 감히 여기에 온것이니 오직 선생은 글을 써 주시옵소서.” 하였다.
내가 보건대 보광전(普光殿)의 5칸은 남쪽으로 면했는데 그 뒤에는 설법전(說法殿)의 5칸이 있으며, 또 그 뒤에는 사리전(舍利殿) 1칸이 있고, 또 그 뒤에는 정청(正廳) 3칸이 있다. 정청의 동서에는 방장 2곳이 있어서 각각 3채인데, 동쪽 방장 동편에는 나한전 3칸이 있고, 서쪽 방장 서편에는 대장전(大藏殿) 3칸이 있다. 입실료(入室寮)는 동쪽 방장 앞에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시자료(侍者寮)는 서쪽 방장 앞에 있어서 동편으로 면했다. 설법전(說法殿) 서편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고 또 그 서쪽에는 수좌료(首座寮)가 있으며, 설법전 동편에는 영당(影堂)이 있고 또 그 동쪽에는 서기료(書記寮)가 있어 모두 남쪽을 면했다. 영당 남쪽에 서편으로 면한 것은 향화료(香火寮)요, 조사전 남쪽에 동편으로 면한 것은 지장료(知藏寮)이다. 보광전 동쪽 조금 남쪽으로는 전단림(?檀林)이 있어 동운집(東雲集)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西雲集)이 동편으로 면해 있다. 동운집 동쪽에는 동파침(東把針)이 있어 서편으로 면했고, 서운집 서쪽에는 서파침(西把針)이 있어 동편으로 면했는데, 천랑(穿廊)이 3칸으로서 서승당(西僧堂)에 접해 있어, 이곳은 바로 보광전 정문(正門) 3칸이요. 문의 동랑(東廊)은 6칸으로서 동객실(東客室) 남쪽에 접해 있고, 문서편으로 열중료(悅衆寮) 7칸이 있으며 여기서 북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료(東寮)이다. 정문 동쪽에 서편으로 면한 5칸이 있는데, 이것은 동객실이요. 그 서쪽이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서객실(西客室)이다. 열중료 남쪽에는 관음전이 있고, 그 서쪽에 동편으로 면한 5칸은 욕실(浴室)이며, 부사료(副寺寮) 동쪽에는 미타전이 있다. 도사료(都寺寮) 5칸은 남쪽으로 면했으며, 그 동쪽에는 고루(庫樓)가 있고 그 남쪽에는 심랑(心廊) 7칸이 있어 미타전에 접해 있다. 그 북쪽에는 장고(醬庫) 14칸이 있으며, 고루 동쪽 11칸에는 고(庫)의 문이 있고, 누각으로부터 동쪽으로 4칸이 있으며, 또 꺾어져 북쪽으로 6칸이 있고 또 꺾이어 서쪽으로 2칸이 있다. 그 서쪽은 비어 있고 바로 정문(正門) 조금 동편에 종루(鐘樓) 3칸이 있고 종루 남쪽에는 5칸이 있는데, 사문루(沙門樓)이며, 종루 서편 동쪽으로 면한 것은 접객청(接客廳)이다. 종루에서 동북쪽으로 향하여 지빈료(知賓寮)가 있다. 접객청 남쪽 동편으로 면하여 양노방(養老房)이 있고 지빈료 동편 서쪽으로 면하여 전좌료(典座寮)가 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꺾이어 7칸이 있는데 향적전(香績殿)이요, 향적전 동쪽과 고루의 남쪽에는 원두료(圓頭寮) 3칸이 있어 서쪽을 면했다. 향적전 남쪽에 있는 4칸 마구(馬廐)다.
집이 모두 2백 62칸이요, 불구(佛軀)는 15척(尺)이나 되는 것이 7개요, 관음상(觀音像)은 10척으로서 각전(覺田)이 시주한 것이다.
크고 웅장하고 미려하기가 동국(東國)에서는 제일로서 이것을 보기 위하여 강호에서 모여드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런 절은 비록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나는 본래 부처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현릉(玄陵)이 이를 일찍이 스승으로 삼았기 때문에 경모(敬慕)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하물며 임금의 뜻을 받들어 명(銘)을 지은 터이므로 대사(大師)의 평생을 자세히 조사하여 더욱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았으니 어떠하겠는가? 부처를 만들고 탑을 세웠어도 조금도 공덕이 없으나 대사의 도(道)에는 의논할 바가 아니다. 절간(絶磵)의 청하는 것과 각전(覺田)의 부지런한 것이 헛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역사의 시작함과 끝마침을 물었더니 모년 모월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능한 일이로다. 어찌 그다지 쉽게 이루어졌는가. 대사의 도가 아니였다면 어찌 능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사의 제자들이 또 일하는 재주가 있어서 이같이 쉽게 이루었겠는가. 비록 그러나, 기본을 이룩하고 계통을 있게 하여 이것을 계승하게 하는 것은 군자의 일이나, 그 뒤에 올 일을 돌아보지 않고 그 그릇을 헤아리지 않고 자기의 욕심을 좇아서 그 사치를 다하는 것은 군자가 더럽게 여기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대사는 이미 먼저 아는 밝음이 있었고 보제의 원하는 것이 어찌 도량에서 마땅히 더욱 흥성하여 조금도 쇠폐됨이 없음을 알았겠는가. 이에 나는 즐거이 이 기를 쓰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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