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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양촌 기(陽村記)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4. 4. 02:50

기(記)
 
 
양촌 기(陽村記)
 

양촌(陽村)은 나의 문생인 영가(永嘉) 권근(權近)의 자호이다. 근(近)의 말에 이르기를, “근이 선생의 문하에 있어 나이는 가장 어리고 학문도 가장 낮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여 미치려 함은 가까운 데서부터 먼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字)를 가원(可遠)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천하에 가깝고 또 먼 것은 그것을 안으로 구하면 정성이요, 밖으로 구하면 양(陽)이라 하는데, 정성은 오직 군자이어야만 실천하는 것이요, 양(陽)이란 것은 어리석은 남자나 어리석은 여자라도 모두 다 같이 아는 바이다. 봄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매우 무더우며 가을에는 건조하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따뜻하여, 세공(歲功)이 이루어지게 되고 민생(民生)이 살아 갈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근이 그윽히 스스로 성인이 인재를 만드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서와 예악의 가르침이 모두 천시(天時)에 순종하는 바가 되므로, 중니(仲尼)가 일찍이 말하기를, '나를 숨긴다고 하는가. 나는 숨기지 않았노라.’ 하였으니, 대개 중니는 천지와 같고 일월과 같이 넓고 커서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남을 대신하여 밝게 비치지 않는 것도 없어 모든 물건이 그 사이에 있어서는 형형 색색으로 모든 근본 바탕을 드러내어 빠짐이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소리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못 속에 뛴다.” 하였으니, 상하에서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인데, 무슨 숨김이 있겠는가. 비록 그 음험하고 간사한 무리라도 역시 모두 그 뜻을 숨김이 없으니, 부자(夫子)의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감화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소소(昭昭)하게 밝고 호호(浩浩)하게 크도다.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無雩)에 바람쐬는 일같은 것은 오히려 족히 화기가 유행함을 알게 되어 당우(唐虞)의 기상(氣像)과도 다름이 없으니, 그 시절에 맞춰 비가 와서 감화시킴으로써 만물이 번창하고 번식하는 것이야 다시 말해 무엇하랴.
슬프다. 중니(仲尼)는 천지와 일월을 위해서 그를 따라 노는 3천 명 중에서도 속히 학문을 배운 70명은 모두 양도(陽道)를 뚜렷이 찾아 나타난 자들이요, 보고서 안 자는 심히 적다.
증자(曾子)와 자사(子思)는 다행히 글을 저술하여 오늘날에 이르렀고, 염락(濂洛)의 학설이 행해진 뒤에야 학자들이 그 글을 읽어서 중니의 천지에서 노는 것과 같았고, 중니의 일월을 보는 것과 같았는데, 진한(秦漢) 이래로 음(陰)에 가리고 막혀 어두컴컴하여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것이 맑은 바람이 일어 흔적도 없이 쓸어버린 것과 같았으니, 얼마나 쾌한 일이냐. 10월은 양(陽)이 없는데도 양월(陽月)이라고 이르는 것은 성인(聖人)의 뜻이니 이것은, “큰 과실을 먹지 않는다.”는 교훈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 성인이 양을 붙드는 것이 지극하도다.《춘추(春秋)》는 성인의 뜻인데 기린이 양물(陽物)로써 사로잡혔음을 성인이 몹시 상심해 하였으므로, 춘추를 지을 적에 춘왕 정월(春王正月)이라고 썼고, 이것을 해석하여 말하기를, “일통(一統)을 크게 한다.”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때를 만나지 못했으면 그만이지만 만났으면 천자를 도와 일통을 크게 하여 사해에 양춘(陽春)을 펴게 할 뿐이다. 나같은 사람은 늙었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으랴. 가원(可遠)은 그 생각한 대로 자호를 하여 더욱 힘쓸지어다. 힘쓰는 데는 마땅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면 반드시 정성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로다.
기미(己未)년 봄 3월 계유(癸酉)에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