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이개 ▒

사육신묘(死六臣墓) 유래

천하한량 2007. 4. 2. 18:37

 

<사육신묘(死六臣墓)>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185번지 2호 기지(基地) 9,370평에 사육신묘가 자리잡고 있다. 사육신묘는 조선 세조 2년(1456) 6월에 단종의 복위운동을 하다가 실패하여 순절한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ㆍ유응부(兪應孚)ㆍ이개(李塏)ㆍ하위지(河緯地)ㆍ유성원(柳誠源)의 묘.

 

  단종의 복위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은 위에 들은 6인 이외에도 권자신(權自愼)ㆍ김문기(金文起) 등 70여 인에 달한다. 이 많은 희생자 가운데 사육신이라 하여 위의 6인만이 꼽히는 것은 당대 절의파(節義派)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이 <사육신전(死六臣傳)>을 써서 후세에 전함으로써 단종 복위 운동의 희생자들 가운데 위의 6인만이 크게 부각되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위 6인만이 단종 복위 운동의 희생자로 오인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든 이 사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곡절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사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 유씨지묘, 성씨지묘, 이씨지묘라 새긴 표명(標名)이 서 있는 묘 4개가 있었고, 그 뒤쪽 8, 9보 사이에 또 하나의 묘가 있어서 민간 사이에서는 이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쪽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의 묘라고 전하여 왔다. 표석에는 보통 남자의 경우에는 씨(성)명[氏(姓)名]과 관작(官爵)이 기각(記刻)되고 부인의 경우에는 씨(성)만을 기각하는 것이어서 사육신묘가 부인의 묘로 의심되기도 하였으나, 4개의 묘가 나란히 있는 것으로 보아 부인의 것이 아님이 인정되어 왔다.

 

  이 사육신묘가 있는 한강 언덕 위는 옛날 사형장이란 말이 전하여 사육신이 이 곳에서 사형을 당하고 묻힌 것이 아닌가도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심에 불과하다. 사육신 중 박팽년은 옥사하였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인(自刃)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 앞길에서 거열(車裂)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민간 사이에 전하여 오던 사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숙종 때부터이다. 숙종 5년(1679)에 왕이 노량에서 열병(閱兵)하고 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사육신묘를 봉식(封植)케 한 것을 비롯하여 동왕(同王) 17년에는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복작(復爵)함과 함께 관원을 보내어 치제케 했다. 그리고 동왕 7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동왕 18년에는 사액(賜額)됨으로써 사육신의 충절은 국가적으로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

 

  다시 숙종 24년(1698)에는 전현감(前縣監) 신규(申珪)의 소청으로 단종이 복위됨으로써 사육신을 비롯하여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순절한 사람들의 충절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고, 함안에는 생육신을 추모하는 사우(祠宇)로 서산서원(西山書院)이 설치되어 사액함으로써 생육신의 절의가 또한 국가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이 때 박팽년의 7대손 동궁좌익찬(東宮左翊贊) 박숭고(朴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였는데, 성씨의 두 무덤 가운데 뒤편에 있는 것은 표석이 없고 강 연안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날로 많아져서 그들 무덤 가운데서 거의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네 무덤만 수축하였다는 것이며, 그 수축은 표석의 부러진 것은 바꾸어 세우고 그 나머지는 글자만 크게 하여 새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육신묘가 공식화됨으로써 중인(衆人)의 존숭(尊崇)을 받게 되었으나, 이 사육신묘는 실제로 후세에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가 마련되기까지는 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성삼문의 사신묘(四臣墓)가 되는 셈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하위지의 묘는 선산부(善山府) 서쪽 고방산(古方山) 언덕에 있다고 하고, 유성원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되어 있다.

 

  그러다가 1977년에 서울시가 사육신 묘역을 성역화하면서 종래에 없었던 하위지와 유성원 두 사람의 묘를 새로 마련하기로 하고 허묘(虛墓)를 써서 사육신의 묘소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하위지와 유성원의 허묘를 써서 사육신의 묘소를 모두 갖추기로 결정하자, 사육신에 대한 시비가 일어났다. 그것은 [백촌 김문기 선생 육신묘역봉안추진위원회(白村金文起先生六臣墓域奉安推進委員會)]가 서울시에 김문기의 허묘를 새로 성역화되는 육신 묘역에 봉안하여 줄 것을 진정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진정의 주요 내용은 <세조실록>의 기술 내용으로 보아 사육신이라 함은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과 김문기가 되나, 남효온이 <육신전(六臣傳)>에 김문기와 유응부를 바꾸어 기술하여 후세에 그렇게 알려지고 말았으니, <세조실록>의 기술 내용에 따라 시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김문기를 사육신 묘역에 봉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에 접한 서울시는 진정 내용을 문교부에 질의하였던 바 국사편차위원회에서는,

   “성삼문ㆍ박팽년ㆍ하위지ㆍ이개ㆍ유성원ㆍ김문기의 6신(臣)이 세조조(世祖朝)에 가려진 6신이라   고 판정되며, 아울러 김문기가 현창(顯彰)되어야 한다.”

라는 사단(史斷)을 내리어 서울시에 회보하였다.

 

  이러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단에 대하여 유씨 문중은 물론, 기타 6신의 문중과 일부 학계에서는 크게 반발을 일으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다시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허묘를 봉안하고 유응부의 묘도 현상대로 존치(存置)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통고를 받은 서울시는 1978년 5월에 사육신 묘역에 김문기의 허묘를 새로 봉안하고 의절사(義節祠)에 그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 묘역에는 7신의 묘와 7신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결코 유응부가 사육신에 들건 들지 않건,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으로, 실제에 있어서는 모두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숭고한 목숨을 바친 희생자로서 그 충절은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것은 사육신뿐만 아니라 그 이외의 희생자들도 함께 그러하여야 될 것이다. 이렇게 1977년에서 1978년에 걸쳐 서울시에서 사육신 묘역에 정화공사를 시행하여 지금의 사육신묘의 완성을 보게 되었으나, 그 동안 지금의 사육신묘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언급한 바도 있지만 숙종 때 사육신의 충절이 국가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자 박팽년의 7대손 박숭고(朴崇古)가 표석을 보수하여 지금에 전한다. 그리고 숙종 7년에 사육신의 사우로 지금 사육신 묘역에 민절서원이 설치되고 동왕 18년에는 사액되었으나, 대원군(大院君)에 의하여 철폐되고 그 자리에는 1954년에 서울시가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는데, 비면의 상단에는 김광섭(金珖燮)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고 비면(碑面)의 중ㆍ하단에는 손재형(孫在馨)이 쓴 사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묘역 안의 신도비(육신묘비)는 정조 6년(1782)에 건립되어 비명은 태학사(太學士) 조관빈(趙觀彬)이 찬(撰)하고 글씨는 당나라 안진경의 집자(集字)로 되어 있다. 그 비각은 1978년에 서울시가 행한 정화공사 때 세워진 것이다.

 

  1977년에서 1978년에 걸쳐 서울시가 정화공사를 시행하면서 종전에 없었던 하위지와 유성원의 허묘를 새로 봉안하는 한편, 김문기의 허묘를 새로 봉안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신도비의 비각과 묘역 입구에 정문(不二門)을 새로 세웠으며, 사당인 의절사(義節司)를 새로 세워 종래의 사육신과 김문기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한강 언덕 위 지금 동작구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묘는 일찍이 민간 사이에서만 알려졌을 뿐, 공식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들면서 차츰 거론되기 시작하다가 숙종 때에 공식화되었다.

 

  이 사육신묘가 있는 곳은 옛날 사형이 집행되던 곳이란 말이 전하기는 하나, 사육신 중의 박팽년(朴彭年)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옥사하였고, 유성원(柳誠源)은 잡혀 가기 전에 자기 집에서 자인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은 군기감 앞길에서 거열을 당하였던 것으로, 이 곳에서 처형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박팽년의 유복자만이 간신히 살아 남아 대를 이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들들이 모두 교형을 당하였고 다른 가족들은 노비가 되어 멍에를 걸머졌었다. 또 이웃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가적인 기휘(忌諱)를 받은 이들의 시체를 거두어 정중히 장사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에 사육신묘가 처음 마련된 곡절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사육신묘가 있는 곳에는 일찍부터 박씨지묘(朴氏之墓), 유씨지묘(兪氏之墓), 이씨지묘(李氏之墓), 성씨지묘(成氏之墓)라 새겨진 표석이 서 있는 4개의 묘가 있었고, 그 뒤편 8, 9보 사이에 또 하나의 묘가 있었는데, 일찍이 민간에서는 이 묘소를 사육신묘라 일컫고 뒤편에 있는 묘는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의 묘라고 전하여 왔다.

 

  표석으로 본다면 남자는 씨명(氏名)과 관작(官爵)이 기각(記刻)되고 부인은 씨(氏)만을 기각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어 사육신묘가 부인의 묘로 의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4개의 묘가 나란히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부인의 묘가 아님이 인정되어 왔다.

 

  이렇게 민간 사이에서만 인정되어 오던 사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즉 숙종 5년(1679)에 왕이 노량에 열무(閱武) 갔다가 유사에게 명하여 사육신묘를 봉식(封植)한 것을 비롯하여 동왕 17년에는 왕이 김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량 사장에서 열무를 하고 나서 관원을 보내어 사육신묘에 치제(致祭)케 하였으며, 뒤이어 육신묘를 숭장(崇獎)하였다.

  그리고 숙종 7년에는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세워지고 동왕 18년에는 편액(扁額)이 하사되었다. 또 이 때 박팽년의 7대손 동궁좌익찬(東宮左翊贊) 박숭고(朴崇古)가 육신묘를 수축하였는데, 성씨의 두 묘 가운데 하나는 표석이 없고 또한 강 연안에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 묘들 가운데서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4개 묘만 수축하되 부러진 표석만 바꾸어 세우고 그 나머지는 글자만 크게 하여 새롭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사육신묘가 공식화되어 사람들이 존숭을 받게 되었으나, 이 사육신묘는 실제로 후세에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가묘(假墓)가 마련되기까지는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의 사신묘(四臣墓)가 되는 셈이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성삼문의 묘는 은진현(지금 논산군 부적면)에 있다고 하고 홍주(지금 홍성)에 있다고도 하며, 하위지의 묘는 선산부(善山府, 지금 선산군) 서쪽 고방산의 언덕에 있다고 하고, 유성원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본다면 성삼문의 묘가 홍주에 있다는 것은 신주만 모신 묘인 것이 분명하고 은진현에 있다는 것은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으며, 하위지의 묘는 선산에 있고, 유성원의 묘는 그 소재가 분명치 않은 것이다.

 

【사육신묘 개요】

▶명칭 : 사육신묘(死六臣墓)

▶분류 : 묘(墓)

▶지정사항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 1동 185-2

 

【사육신묘의 현황】

  사육신묘는 위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세조 2년(1456)에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순절한 6신의 묘이다. 그러나 원래는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 성삼문(成三問)의 묘만이 있었고, 하위지(河緯地)와 유성원(柳誠源)의 묘는 없었다. 그러다가 서울시에서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사육신 묘역의 정화공사를 행할 때 하위지와 유성원의 가묘(假墓, 허묘)를 추봉(追封)함으로써 사육신의 묘를 모두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사육신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순절한 김문기(金文起)의 가묘도 이 때 추봉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 묘역에는 단종의 충절 7신의 묘가 있게 되었다.

 

  묘 앞에 박씨지묘(朴氏之墓)니 성씨지묘(成氏之墓)니 하는 표석이 서 있는데, 그 중에서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의 표석은 시기는 알 수 없어도 상당히 일찍부터 세웠졌던 것으로, 숙종 때 박숭고(朴崇古)에 의하여 보수되어 지금에 전하는 것이다.

 

  신도비(육신묘비)는 정조 6년(1782)에 건립되었는데, 비명(碑銘)은 태학사(太學士) 조관빈(趙觀彬)이 찬하고 글씨는 당의 안진경(顔眞卿)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그리고 비각은 1978년에 세워졌다.

 

  사육신 묘역에 사육신의 사우(祠宇)로 숙종 7년(1681)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이 설치되었으나 대원군(大院君)에 의하여 철폐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1954년에 서울시가 육각의 사육신비를 세웠는데, 비면(碑面) 상단에는 김광섭(金光燮)이 짓고 김충현(金忠顯)이 쓴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으며 비면 중ㆍ하단에는 손재형(孫在馨)이 쓴 6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를 각각 1면씩으로 하여 새겨져 있다. 6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인 의절사(義節祠)와 정문인 불이문(不二門)이 있는데, 모두 1978년에 사육신 묘역의 정화사업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사육신 묘 어떻게 되나】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지방유형문화재 8호 사육신묘는 현재 당초 사육신으로 현창되어 온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하위지, 유성원 이외에 김문기(金文起)의 묘와 위패가 봉안돼 있어 사실상 ‘사칠신묘(死七臣墓)’가 되고 있다. 이 때문에 사육신묘를 찾는 시민들은 ‘사칠신묘’에 머리를 갸웃거리기 일쑤고 특히 어린 학생들에게는 적절한 설명을 하기가 곤혹스럽다는 것이 인솔교사들의 얘기다.

 

   ‘사칠신묘’가 된 경위를 보면, 지난 1977년 9월 ‘김문기 사육신설’에 대한 서울시의 사육신 명단 확인 자문 요청에 따라 국사편찬위원회가 “김문기가 세조조에 가려진 육신으로 판단된다. 사료에 의해 판단컨대 김문기를 현창해야 된다고 사단(史斷)함”이라는 내용의 ‘결의사항’을 발표함으로써 서울시가 즉시 김문기의 허묘(虛墓)를 조성하고 사당에 그의 위패를 새로 봉안했던 것이다.

 

  사육신묘의 관리책임을 맡고 있는 서울시는 1977년말 이곳 주변 3천2백40평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주택과 공장이 밀집한 지역인데다 부근에 마땅한 휴식 공간이 없어 매일 많은 시민들이 이곳에 찾아와 쉬면서 참배도 하는 아담한 공원이 됐다. 건물, 유적 등의 보존상태도 괜찮은 편이고 조경도 비교적 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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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묘 성역화> - [한국일보](1991. 3. 2)

  서울시는 지난 1978년 단종복위운동으로 희생된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륙신묘역성역화사업을 하면서 당시 그곳에 있던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이개 등 4인의 실묘(實墓)를 단장하고 하위지, 유성원, 김문기(金文起) 등 3인의 가묘(假墓)를 새로 만들었다.

  이 중 김문기의 경우, 당시 후손들이 김문기가 유응부 대신 사육신에 포함되어 있다는 <세조실록>의 근거를 들어 유응부 대신 김문기의 묘가 奉安돼야 한다며 사육신논쟁을 제기한 끝에 가묘를 설치하게 된 것.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김문기의 6신이 세조 때 가려진 6신이라고 판정돼 김문기가 현창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서울시에 회시했는데 이 사단(史斷)에 대해 유씨(兪氏) 문중과 학계가 크게 반발하자 서울시는 유씨와 김씨의 가묘를 모두 봉안키로 한 것이다. 


<성승(成勝) 장군묘 사육신묘역에 복원> - [한국일보](1991.11.19)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했다 네 아들과 함께 삼족이 참화를 당한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 장군(?∼1456)의 묘가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륙신묘역(서울시 유형문화재8호)내에 복원된다.

  서울시는 성승 장군의 墓를 원위치에 복원해 달라는 창녕 성씨 문중의 진정을 받아들여 사육신묘역내 성삼문 묘 뒤쪽에 성승 장군묘를 복원하고 비석을 세우는 한편, 사육신을 모신 사당 안에 위패를 봉안키로 했다.

  이와 함께 사당의 명칭을 지난 1978년 사륙신묘역 성역화사업 때 명명했던 의절사(義節祠) 대신 숙종7년 건립 당시의 원래 이름인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바꾸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사륙신묘에는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김문기(金文起)의 묘 외에 성승 장군의 묘가 추가돼 모두 8기로 늘어나게 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 의하면 “조선 왕조실록 육신의총비문(六臣疑塚碑文), 육신기비명(六臣基碑銘), 연여실기술(練黎室記述) 등 사료를 검토한 결과 성승묘가 사육신묘역에 있었다는 사실이 인정되는 만큼 원위치에 복원함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시에 회시했었다.

  또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성승묘의 복원과 함께 민절서원도 복원, 그 내력을 현판에 기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보냈다. 성승 장군은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나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 세조로 즉위하자 당시 유응부 등 무인과 함께 창덕궁 연회 때 별운검(別雲劍-雲劒을 차고 왕을 호위하는 관직)을 맡게 된 기회를 이용, 거사하려다 김질(金礩)의 밀고로 발각, 처형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