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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記) 안동 약원 기(安東藥院記) -이색(李穡) -

천하한량 2007. 3. 24. 18:18

기(記)
 
 
안동 약원 기(安東藥院記)
 

지정 정미년 가을 9월에, 안동부(安東府)를 지킬 신하의 임명이 내렸다. 그 부사로는 지금 찬성사(贊成事) 홍백정(洪栢亭)인데 선녕군(宣寧君)으로부터 뽑혔고, 그 판관으로는 전 장흥 부사(前長興府使) 정무(鄭?)인데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부터 뽑혀 함께 조정을 하직하고 갔다. 10월 10일 이른 아침에 판관이 먼저 청사(廳舍)에 이르러 예를 행하고 대궐을 향하여 은혜를 사례하고 뜰에서 부사를 맞이하였다. 부사도 예를 행하기를 판관과 같이 매우 공경히 하고, 물러나서 고을 아전들의 뵈옴을 받고 예를 마치었다. 고을 부로(父老)들은 좋은 부사를 만났다 하여 서로 경하하니, 명령이 행해지지 않음이 없었다. 다음해 봄 2월에 두 공(公)이 말하기를, “하늘 기운[氣]이 펴서 만물이 처음 나니 월령(月令)을 상고하면 ‘인명이 중하므로 일찍 죽는 것을 대비하여 영위(榮衛)를 널리 펴는 것은 크게 화한 기운을 보호함이다.’ 하였다. 여기에 의약이 공이 있고 탕욕(湯浴)은 도움이 있으니, 어찌 이를 먼저하지 않으리오.”하고, 이에 빈 터를 살폈으나 그런 곳을 얻지 못하였는데, 법조(法曹)의 집이 오래 폐하여 그 터가 남아 있어서 이에 집을 세우고 이름을 약원(藥院)이라 하니, 대개 그 중한 쪽을 좇음이다. 동쪽 집 세 칸은 탕욕을 하는 곳이요, 서쪽 집 세 칸은 약을 공급하는 곳이며 중간에 높은 집은 나라의 사신을 대접하는 곳이다. 동서로 행하는 길손들이 그 급할 때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함도 아낌없이 해야 하는데, 하물며 그 지방이 가장 멀고 그 백성이 가장 순박하여 약 쓰는 법과 청결하는 일을 다 알지 못하고, 악한 기운에 접촉하여 죽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백정공(栢亭公)이 위에서 주장하고 정 판관(鄭判官)이 아래에서 순응하여, 절반의 힘을 들이고도 공이 이루어져 안동(安東)이 길이 그 덕택을 힘입게 되었으니, 이를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르는 말에, “훌륭한 정승이 되지 못하거든 좋은 의원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하니, 의원의 도(道)가 역시 중한 것이다. 지금 백정공이 그런 마음으로 나라를 담당하여 정군(鄭君)의 탕약(湯藥) 쓰는 효력도 점점 나아져서 오직 안동에만 그칠 뿐 아니니, 아, 그 멀리 퍼져 갈 것을 어찌 측량하리요. 정사년 11월 일에 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