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남원부에 새로 둔 제용재의 기[南原府新置濟用財記]
금상 8년 봄에, 간관(諫官)인 익재 시중(益齋侍中)의 손자가 남원 부사로 쫓겨나간 지 돌이 못 되어 선정(善政)의 이름이 남방 수령들 가운데서 최상이 되었다. 내가 이를 적어서 《순리전(循吏傳)》에 붙이려고 한 것이 오래였었다. 국자학유(國子學諭) 양이시 군(楊以時君)은 남원 사람인데, 솔직하고 성실하며 말이 또 미더웠다. 하루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우리 부사의 어진 정사는 사람에게 깊은 감화를 주어서 금석(金石)에 새기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나, 오직 그가 설치한 제용재(濟用財)는 무너지기 쉬울까 두려우니, 진실로 뒤의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을 알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영영 폐가 없다고 보장하지 못할 것이므로, 선생이 글을 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한다. 나는 익재 선생에게서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기 때문에 진실로 그 어진 손자가 있는 것을 기뻐하였고, 또 일찍이 간원(諫垣)의 동료로서 더욱 깊이 서로 알았기 때문에 기꺼이 양군의 말을 좇아 그 일을 상고해 보니, 양군이 말하기를, “매양 사자(使者)가 와서 부세 바치기를 독촉할 때 우리 지현(支縣)에서 미처 반출하지 못하면, 대충(貸充)하는 까닭으로 혹 파산하는 일도 있었는데, 우리 부사가 그런 것을 알고 말하기를, ‘백성에게 포악하게 함이 이보다 더할 수 있으리오.’하며, 포세(逋稅)를 거둬 모아 무명 몇 필을 얻었고, 또 안렴사에게 이런 일을 아뢰니, 가상히 여겨서 무명을 내어 보조하였고, 또 종[奴]의 일로 다투는 일이 있어 관청에 송사하면, 이긴 사람에게는 종 하나에 무명 한 필씩을 받아들이는데, 우리 부사가 판결을 잘하므로 들어오는 것이 더욱 많아져서 총합 무명 6백 50필을 얻었습니다. 향교 세 반(班)에서 각 한 사람씩 뽑아서 이를 맡게 하고, 급할 적에는 지현(支縣)에서 네 사람을 부관(府官)에게 아뢰어 내어 주게 하고, 이식은 받지 않으며 부리(府吏)들을 경계하여 감히 다른 데에는 쓰지 못하게 하여 영구히 법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고을이 비록 산중에 있으나 손님이 자주 왕래하여 그 비용을 거둬들이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니, 우리 부사가 알고 또 말하기를, ‘백성에게 포악하게 하는 것이 다시 이보다 더하리오.’하고, 또 재물을 모아 놓을 뜻을 안렴사에게 아뢰어 무명과 적미(?米) 약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옛날에 둔전이 있는 것을 방자한 아전들이 농간하므로 우리 부사께서 친히 그 일을 맡아 거둬들이니,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여 총계 쌀 2백 석, 콩 1백 50석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나누어 주고 거둬들이는 법을 세워서 본전은 두고 이식을 쓰게 하며, 또 새로 개간한 땅을 계산하면 72석을 거둘 만하니 손님을 공궤하고 또 일용가구까지 완비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 제용재(濟用財)라 이름하니, 이는 백성들에게 사납게 거두는 것이 없고, 지현이 떳떳한 부세를 지켜서 이익을 보게 하고 해를 없게 하여서 백성들이 그 생활을 즐거워하니, 가히 기재할 만하지 않습니까.”한다. 나는 말하기를, “어질다. 그러나 이후(李侯)의 정사에서 이것은 아주 작은 일이므로 내가 별로 달가와하지는 않는다. 이후는 어질고 후함으로써 그 근본을 북돋우고, 강하고 밝음으로써 씀을 이루었으니, 한 고을을 화(化)하게 함이 촉군(蜀郡)과 영천(穎川)에 못지 않을 것이니, 그 기록할 만한 것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일로서도 그 마음씀이 부지런한 것을 보겠다. 아지 못하겠다. 남원 사람이 능히 저버리지 않을 것인지, 그대가 나를 위하여 고을 사람에게 효유하되 고원한 말로 하지 말고 다만 눈앞의 일을 들어서 밝히라. 병든 자는 의원에게 효험을 보았고, 주린 자는 밥을 얻어 살았으니, 그 은혜를 갚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백성은 너의 마음이요, 현(縣)은 너의 지체[支]이나 현이 있고 백성이 있어야 너의 부(府)가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마음과 지체가 모두 피곤하여 주리고 병든 것보다 더 심하였는데, 이후가 와서 이미 병을 고쳤고 밥을 먹였는데, 은혜 갚을 줄을 알지 못하면 그래도 너희가 사람이라 하겠는가. 은혜 갚기를 어떻게 하면 마땅할 것인가. 그것은 그 법을 무너뜨리지 말고 그 뜻을 떨어뜨리지 않으면 이것으로 가하다.”하니, 양군이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습니다.”한다. 이후의 이름은 보림(寶林)인데, 을미년에 급제하여 뜻가짐이 충성되고 곧아서 옛날 쟁신(爭臣)의 기풍이 있으니, 그 고을을 다스리는 것도 여기 근본함이 많다. 기해년 8월에 기한다.
[주D-001]순리전(循吏傳) : 지방에 군수로 가서 선정한 사람을 순리(循吏)라고 하여 역사에서는 따로 《순리전》을 두어서 성한 사람들만을 표창하였다.
[주D-002]촉군(蜀郡)과 영천(穎川) : 촉군(蜀郡)은 한(漢) 나라 때에 문옹(文翁)이라는 이가 촉군의 태수공이 되어 학교를 많이 세워 교육을 힘썼으므로 촉군에서 인재가 많이 났다고 한다. 영천(穎川) 역시 한 나라 시대에 소신신(召信臣)이라는 사람이 영천 태수가 되어 인덕(仁德)으로 정치를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소부(召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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