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記)
둔촌 기(遁村記)
광주(廣州) 이씨(李氏)가 이미 《맹자》 집의(集義)의 집(集) 자를 취하여 이름으로 삼고,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호연(浩然)을 취하여 자(字)로 삼았으며, 성산(星山) 이자안(李子安)이 글을 지어 해설하였다. 내가 또 그 뒤에 제사(題辭)하여 주었더니, 호연은 말하기를, “내 이름과 내 자에 대해서는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나, 내가 황야(荒野)에 도망하여 취성(鷲城)의 당화(黨禍)를 피하였으니, 그 고생스러운 형상은 비록 미련한 사람이라도 듣고 실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내가 오늘까지 살아 온 것은 둔(遁)의 힘이다. 무릇 숙손(叔孫)은 적(狄)을 이김으로써 그 아들의 이름을 지었으니, 대개 그 기쁨을 표한 것이다. 아들은 몸에서 나누어진 것인데도 오히려 이름을 지어서 그 기쁨을 기록하였는데, 하물며 나 자신의 이름이리요. 지금 내가 이미 이름과 자를 다 고쳤으니 내가 다시 처음이 된 것이다. 둔(遁)이 나에게 덕된 것을 장차 내 몸을 마치도록 잊을 수 없는 까닭으로, 나의 있는 곳을 둔촌(遁村)이라 하였으니, 그 둔(遁)의 덕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또한 그 위험에서 나와서 위험을 잊지 않는다는 뜻을 붙여서 스스로 힘쓰고자 함이다. 둔(遁)은 《맹자》의 지언(知言 도리(道理)에 밝은 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뜻은 그윽히 이와 같이 취하였으니, 오직 선생은 가엾게 여겨 두세 번 번거롭게 함을 잊으시고 끝내 은혜를 베푸옵소서.”한다. 나는 말하기를, “그대가 《맹자》를 진실로 맛보고 즐거워하니 성인의 도를 찾는 경지에 거의 이르렀도다. 내가 이 까닭으로 다른 글은 상고하지 아니하고 《맹자》에 대한 것으로써 말을 마치겠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순(舜)이 천자가 되고 고요(皐陶)가 사(士 법관)가 되었을 적에 고수(?? 순의 아버지)가 사람을 죽이면 순은 어떻게 하겠습니까.’하니, 맹자는 말하기를, ‘아버지를 업고 도망가서 바닷가에 살면서 흔연히 즐거워하며 천하를 잊을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비록 비유한 말이긴 하나 이와 같이 처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호연의 화(禍)가 비록 자신의 소치이나 늙은 어버이와 어린 자식들을 업고 안고 이끌면서, 낮에는 숲속에 숨고 밤에는 비와 이슬을 무릅쓰고 험한 산골 속을 걸으면서 쫓는 이가 뒤에 따라올까 두려워하여, 숨을 죽이고 처자에게 경계하여 감히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였으니, 역시 그 도망은 참혹하였다. 이는 마땅히 꿈에도 놀라고 깨어서도 놀랄 것인데 바야흐로 의기가 양양하여, 안으로는 몸이 즐거워하고 밖으로는 남에게 자랑하니 호연은 참으로 비상한 사람이다. 그 속에는 반드시 주심(主心)이 있고 헛이름을 얻은 것이 아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릴 적에 반드시 그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 하는 바를 어그러지게 하며 어지럽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더 능하게 한다.’ 하였으니, 호연은 참으로 그 몸이 굶주렸고 그 하는 바도 어그러졌으니, 실지로 큰 임무가 그에게 내릴 것을 기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호연이 둔촌에서 몸을 마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그 강산 경치의 좋음과 아침에 밭갈고 저녁에 글읽는 낙(樂)은 호연의 스스로 가진 경지이니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한다. 창룡(蒼龍) 정사년 9월에 기한다.
[주D-001]취성(鷲城)의 당화(黨禍) : 취성은 영산(靈山)의 별칭인데, 신씨(辛氏)는 영산이 본관이므로, 취성의 당화라 함은 신돈(辛旽)의 화를 말함인 듯하다.
[주D-002]숙손(叔孫)은 …… 지었으니 : 혹 숙향(叔向)이라 하였음은 숙손(叔孫)의 오기(誤記)이다. 춘추 때에 오(烏) 나라의 숙손씨(叔孫氏)가 적(狄)이라는 이민족의 침략을 당하였는데, 그 적(狄) 사람 중에 굉장한 거인(巨人)이 있어 그를 장적교여(長狄僑如)라고 불렀다. 그 장적교여를 숙손씨가 싸워 이기고 적군을 멀리 쫓친 후에 마침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아들 이름을 교여(僑如)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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