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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贊)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 -이색(李穡)-

천하한량 2007. 3. 24. 05:41

찬(贊) 
 
증 시중 정공화상 찬 병서 (贈侍中鄭公畵像贊 幷序 )
 

수문하시중 광평부원군(守門下侍中廣平府院君) 이공(李公)이 임인(壬寅)년에 여러 장군과 함께 서울을 수복했는데, 그 총병관(總兵官)은 곧 찬성사상의 응양군상호군(贊成事商議鷹揚軍上護軍) 정세운(鄭世雲)이었다. 원수(元帥) 세 사람은 총병의 공적이 자기네보다 위에 올라감을 시기하여 부하를 시켜서 끄집어내어 그를 해쳤다. 세 원수는 비록 죄를 받고 죽었으나 세상에서 정공을 슬퍼하는 마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광평공은 생각하기를 “정공의 이름은 영원히 전하고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후세에서 알지 못할 터이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하였다. 또 이르기를, “능연각(凌烟閣)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옛날 제도이긴 하지만 지금에는 실시되고 있지 않으니 그의 화상을 그려서 철을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는 편이 낫겠다.” 하였다. 이미 완성되매, 한산 이색(韓山李穡)에게 청하여 찬을 지으라 하였다. 색이 광평군과는 함께 승선(承宣)으로 있으면서 공민왕을 섬겼다. 그러므로 정공이 비상한 인물임을 알았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비위를 맞추려한 적이 없었고 뜻을 확고히 가져서 조금도 변한 적이 없었다. 신축(辛丑)년에 남쪽 복주(福州)로 옮겨갈 때에 임금이나 신하가 북쪽을 염려하는 마음이야 다시 말한들 무엇하리오, 정공은 비장히 가기를 자청하였다. 열흘남짓 한달이내에 나라가 다시 안정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었겠는가. 옛적 현종(顯宗)때에 강시중 한찬(姜侍中邯贊)이 경술(庚戌)년에 남쪽으로 행차 하실 것을 청하고 무오(戊午)년에는 북방에서 적을 막아냈으니, 그 공적이 탁월하였다. 근세에 금산 김씨(金山金氏)가 영토를 침범할 적에 조충(趙沖)과 김취려(金就礪)의 공적이 컸고, 기해(己亥)년에 모적(毛賊)이 서경(西京)을 침범할 적에 총병(總兵) 이승경(李承慶)의 힘이 컸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영토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강시중(姜侍中)처럼 두가지의 계책이 한 몸에서 일어난 것과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 현종(顯宗)은 금성(錦城)까지 가셨고 공민왕은 복주(福州)까지 가셨으니, 아아 참아 말할 수 있는가. 정공은 남쪽으로 행차하기를 결정할 때에 참여하였고 또 능히 모든 군대를 통솔하고 여러 적들을 쫓아 내어 홀로 큰 공을 세웠으니 그 위대함은 강공과 맞세울만 하였다. 그러나 강공은 개선(凱旋)할 때에 현종이 친이 교외에까지 나아가서 맞이하였고 시를 지어주어 그를 표창했으니, 그런즉 곧 정공이 불행을 당한 것은 공민왕으로서의 슬픔이었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이었는가. 아아, 슬프다. 아아, 슬프다. 뒷날 정공의 화상 앞에 경례를 올리는 사람은 이 화상이 광평공(廣平公)에 의하여 만들어진 줄 알터이니 반드시 천년 뒤에라도 경의를 표하면서 이르기를, “정공이 진실로 공이 있었다. 그러나 광평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정공의 얼굴을 보게 되었으랴.”할 터인즉 광평공이 선을 좋아한 실효가 더욱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길게 읊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정씨는 광주 장택현(光州長澤縣) 출신이며 공민왕 11년의 공신이다. 아우는 세문(世文)이며 아들은 없다. 찬에 이르기를, “아아, 정공이여, 겉으로는 소박하며 안은 확고하였다. 공민왕의 공신으로 병신(丙申)년에 출발하였다. 적(賊)이 중국에서 두루 돌아다니다가 우리 영토에까지 침입하였다. 우리는 그들의 무력을 피하였는데 공은 마침내 적을 내쫓았다. 이미 그들을 무찔렀는데 부하가 공을 해쳐버렸네. 해친 자들도 다 없어졌으니 아아,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없었던가, 강공(姜公)은 옛날 일이지만 공의 위대함, 그와 맞서리로다. 우리 광평군 아니었으면 누가 그리며 누가 기록했으랴. 송악산(松嶽山) 푸르른데 우리 명당(明堂) 웅장할사, 정공의 영향은 영원하게 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