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申/受常參, 輪對, 經筵。 上曰: “春秋館已抄送忠臣姓名乎?” 侍講官偰循對曰: “高麗之季, 惟注書吉再耳。” 上曰: “太宗召再, 再進講詩一篇而還, 是自比於箕子陳《洪範》也。 當時豈無通詩者, 而再敢進講, 甚迂闊矣。” 安崇善對曰: “臣亦見之, 以爲迂也。” 循曰: “再非博學, 但識《詩》、《書》。” 上曰: “其行有可取者, 予旣追贈司諫, 又用其子。” 循曰: “再仕於僞朝。” 上曰: “再閥閱人乎?” 循曰: “起於寒微。” 上曰: “前朝大家巨族, 皆仕我朝, 再以寒士而不仕, 是又難也。 無乃類陶潛乎? 潛以小官, 不仕於晋, 其行宜褒美, 以傳於後也。” 又曰: “崔都統使當恭愍王之時有大功, 然乎?” 循曰: “崔瑩將兵征耽羅, 玄陵薨無嗣, 王氏正派猶存, 當時宰相畏瑩立辛禑。 瑩還, 痛其立禑, 然已在位, 未敢易也。” 上曰: “瑩不識義理故也。 若擧大義, 廢(耦)〔禑〕立王氏, 則何如?” 循曰: “禑已立, 故不敢耳。 後又爲攻遼之擧。” 上曰: “李穡屢見請罪, 何其以識理名儒, 阿附辛氏乎? 及問立誰爲主, 乃曰: ‘有先王之子。’ 豈不知禑非其子也, 不立王氏而立禑, 何也? 無乃知我太祖之興, 而故立禑乎?” 循曰: “太祖開國, 乃在回軍之後, 其時王迹未著。” 上曰: “然則何以立禑乎? 王氏正派, 有誰乎?” 循曰: “正派無後, 但有恭讓王。” 上曰: “玄陵何乃以辛旽之子爲己子, 欲立君位而絶王氏乎? 古有寧立異姓, 而不立同姓者, 其意一也。” 循曰: “李穡云: ‘時人謂我爲馮道, 予甚愧之。’” 上曰: “其事正類馮道。 穡引晋時事以爲言, 然晋時則北狄强盛, 不得已而爲之, 不可以比高麗也。” 又曰: “吉再節操可褒, 鄭夢周, 何如人也?” 循起而對曰: “臣聞其忠臣, 然春秋館旣不移文, 上亦不命, 臣不敢請耳。” 上曰: “夢周之事, 太宗知其死於忠義, 已曾褒賞, 何必更議, 宜錄忠臣之列?” 又曰: “李崇仁之才, 權近、卞季良皆溢美之。 初修《高麗史》之時, 削近救崇仁之文, 近、季良之改撰也, (遠)〔還〕書之, 然其事過情, 此史亦未成之書, 若改修之, 則當削之。 近作《陶隱集序》稱譽之, 又書追贈之意, 乃虛事也。 季良問於近曰: ‘何以書不追贈之事?’ 答云: ‘今以追贈書之, 則後必追贈矣。’ 此甚失言。 季良亦稱崇仁曰: ‘賢。’ 太宗覽之曰: ‘溢美矣。’ 季良對曰: ‘請改賢爲材。’ 近與季良皆以崇仁爲賢於穡矣。” 循曰: “鄭道傳嫉崇仁文章, 令致死, 非死於忠者也。 穡亦稱其文耳。” |
세종 50권 12년 11월 23일 (경신) 001 / 전조의 길재·최영 등에 대해 얘기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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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참을 받고, 윤대를 행하고, 경연에 나아갔다. |
“춘추관에서는 충신의 성명을 벌써 뽑아 보냈느냐.” |
“고려의 말년에는 주서(注書)였던 길재(吉再) 뿐입니다.” |
“태종께서 재(再)를 부르시니, 재는 《시경(詩經)》 한 편의 강의를 드리고 돌아갔으니 이는 스스로 기자(箕子)가 홍범(洪範)을 진술한 것에 견준 것이다. 당시에 《시경》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없어서 재가 감히 강의를 드렸단 말인가. 정말 오활한 노릇이다.” |
“신도 이것을 보고 오활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재는 박학한 사람이 아니고 《시경》과 《서경》을 알았을 뿐입니다.” |
“그의 행동은 가치가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사간(司諫)을 추증(追贈)하고 또 그 아들을 등용하였다.” |
“전조의 대가(大家)의 귀족들은 모두 우리 왕조에 벼슬하였는데, 재는 미천한 선비로서 벼슬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도잠(陶潛)과 비슷하지 아니한가. 도잠은 작은 벼슬로 진(晉)에 벼슬하지 않았다. 그런즉 그의 행적은 마땅히 포창하여 후세에 전해야 될 것이다.” |
“최 도통사(崔都統使)는 공민왕 때에 있어 큰 공로가 있었다 하는데 사실인가.” |
“최영(崔瑩)이 군대를 거느리고 탐라를 정벌하였고, 현릉(玄陵)이 죽은 뒤에 왕씨(王氏)의 혈통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도 당시의 재상은 영을 두려워하여 신우(辛禑)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영이 돌아와서 신우를 세운 것을 마음 아프게 여기었으나, 벌써 임금의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감히 바꾸지 못한 것입니다.” |
“영은 의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만일 대의를 들고 나와서 우(禑)를 쫓아내고 왕씨를 세웠으면 어떻겠는가.” |
“우가 벌써 서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뒤에는 또 요를 공격하는 일을 일으켰습니다.” |
“이색(李穡)도 여러 번 죄를 주기를 청하는 탄핵을 받았는데, 어찌하여 의리를 아는 학자로서 신씨(辛氏)에게 아부하였는가. ‘누구를 임금으로 세워야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선왕(先王)의 아들이 있다.’고 하였으니, 우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왕씨(王氏)를 세우지 않고 우를 세운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은 우리 태조(太祖)께서 일어나실 줄을 알고 일부러 우를 세운 것이 아니었을까.” |
“태조께서 개국(開國)하신 것은 곧 회군(回軍)한 뒤의 일이요, 그 때에는 임금 노릇 하시려는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
“그러면 어째서 우를 세웠을까. 왕씨의 직계 혈통으로는 누가 있었는가.” |
“직계 혈통에서는 후손이 없었고, 다만 공양왕(恭讓王)이 있었을 뿐입니다.” |
“현릉(玄陵)은 어째서 신돈(辛旽)의 아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 임금의 자리에 세우고 왕씨의 혈통을 끊어버리려 하였을까. 옛적에, ‘차라리 다른 성을 세울지언정 같은 성은 세우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뜻과 마찬가지로다.” |
“이색(李穡)이 이르기를, ‘세상 사람이 나를 풍도(馮道)라고 하지만,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습니다.” |
“그 사실이 바로 풍도(馮道)와 같다. 색(穡)은 진(晉)나라 때의 사실을 이끌어 말했으나, 진(晉)나라 때에는 북방의 오랑캐가 강성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으니, 이것을 고려에 비교할 수는 없다.” |
“길재(吉再)의 절조는 포창할 만하다. 정몽주(鄭夢周)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
“신이 그가 충신이란 말은 들었습니다마는, 춘추관(春秋館)에서 이에 대한 공문을 보내 온 것이 없고, 성상께서도 명령하시지 아니하여, 신은 감히 청하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
“몽주(夢周)의 일은 태종께서 그가 충의를 위하여 죽은 줄을 아시고 벌써 포창하고 상을 내리셨으니,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느냐. 충신의 대열에 기록함이 옳다.” |
“이숭인(李崇仁)의 재주는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이 모두 그를 지나치게 칭찬하였다. 처음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 근(近)이 숭인(崇仁)을 변호한 글을 삭제했는데, 근과 계량이 이를 다시 편찬할 때에, 추가하여 써 넣었으나, 그 사실은 실정보다 지나쳤노라. 이 역사는 역시 완성되지 못한 책이니, 만일 이것을 고쳐서 꾸밀 때에는 그것을 없애야 될 것이다. 근(近)이 《도은집(陶隱集)》의 서문을 지었는데 그를 극히 칭찬하였고, 또 벼슬을 추증(追贈)한 뜻을 썼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닌 얘기다. 계량이 근에게 묻기를, ‘어째서 추증하지도 아니한 사실을 썼느냐.’ 한즉, 대답하기를, ‘지금 추증했다고 쓰면 뒤에 반드시 추증될 것이다.’고 하였다 하니, 이것은 큰 실언이다. 계량도 숭인을 가리켜 ‘어질다’고 하였으되, 태종께서 보시고 ‘이것은 지나치게 칭찬한 말이다.’ 하시므로, 계량이 대답하기를, ‘어질다[賢]는 것을 〈그러면〉 재(材)로 고치겠습니다.’ 하였다. 근과 계량은 모두 숭인을 색(穡)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였다.” |
“정도전(鄭道傳)이 숭인이 문장에 능한 것을 질투하여 그를 죽게 만든 것이요, 충의를 위하여 죽은 것이 아니었으며, 색도 그의 문장을 칭찬하였습니다.”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윤리(倫理) / *역사-전사(前史)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