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실록 ▒

太宗 22卷 11年 7月 2日 (辛酉) 005 / 하윤이 네 번이나 상소하여 무죄를 진달하다

천하한량 2007. 3. 23. 02:19

太宗 22卷 11年 7月 2日 (辛酉) 005 / 하윤이 네 번이나 상소하여 무죄를 진달하다


○功臣臺諫又請之罪, 上曰: “其所言用事者, 若指太祖, 不待卿等之言, 當示以法也。 卿等何以固請乎? 勿復言。” 上書至四, 自陳己之無罪, 上厭其煩, 悉還其書。

其一曰, 臣以不肖被劾, 愧歎何量! 然臣竊惟, 有國家者, 創業與守成不同。 創業之主, 必出於前代衰亂之季, 必有豪傑之士, 歸心協謀, 用事於其間, 陰引士類, 附己者進之, 異己者斥之, 親於舊主而忠於舊主者, 務皆去之, 使舊主之勢, 孤立於上, 擧朝之臣, 無一忌憚者, 然後大計乃成。 若以來至于, 莫不皆然。 及至大事旣成, 然後前代之時, 斥去之臣, 皆爲所用, 此理勢之不得不然者也。 恭惟我太祖, 以神武不世之德, 當前朝之季, 任兼將相, 自擧義回軍之後, 衆心願戴, 天命有歸矣。 然前代君臣之分尙存, 安危之機, 不可不察。 豈非一二奇計之, 臣用事於其間, 附己者進之, 異己者斥之, 然後大業以成哉? 李穡在前朝, 位爲冢宰, 但知守常, 宜爲見忌於用事之臣。 權近行狀曰: “恭讓君立, 用事者忌公不附己, 劾貶。” 是專指中間用事之人耳。 況尹彛李初連署衆名, 獻書上國, 請迎皇子! 本國之俗, 役奴婢食土田, 家家有公侯之樂, 豈願得中國之人而爲主哉? 況禹玄寶旣幸孫婦之父爲君, 豈欲立他人哉? 其爲詐僞灼然。 以太祖之明睿, 不肯有小疑, 但一二用事之臣, 以其舊怨者之名, 在衆名之中, 力主其議, 欲成其罪耳。 況太祖當推戴之時, 謙讓固拒, 至卽位之日, 當施寬大之仁, 以致惟新之化? 向之用事者, 必欲報其舊怨, 歸罪等, 此豈出於太祖之心哉? 及乎守成之日, 用事之臣, 不得一有如前日之所爲, 可以見太祖之明斷, 而前日之所爲, 果皆非出於太祖之命矣。 之行狀之意如此, 故臣因而撰序文。 臣竊謂太祖受禪之際, 趙普之謀、韓通之死, 史策皆以太祖之不知書之, 其寬大之德, 益光於後世矣。 若謂創業草昧之時, 用事之臣奇計陰謀之事, 皆以爲出於太祖之命, 則有如縊殺李種學, 杖殺李崇仁等六七人之事, 此豈太祖之所知哉? 若不以實書之, 以用事者之所爲, 似皆出於太祖, 則臣恐太祖之盛德光輝, 有累於後世矣。 伏惟殿下, 聖學緝熙, 義理之精微, 靡不融會, 幸加聖慮, 俾蒙寬免, 則生者豈不願糜身, 死者豈不思結草, 圖報聖德之萬一哉? 伏望聖慈優容焉。 其二曰, 臣庸暗失誤, 罪在不測, 伏蒙殿下睿察明斷, 許令臣屛迹悔罪, 再生之恩, 實同天地, 感激之情, 何可勝言! 然臣謹考權近所撰李穡行狀曰: “恭讓君立, 用事者忌公不附己, 劾貶長湍。” 臣謂恭讓之時, 用事君相之間者, 不過一二人, 國人之所共知, 豈以用事二字, 指斥太祖乎? 臣於序文, 削去用事二字, 只書忌公不附己者, 劾貶長湍, 其不去不附己三字者, 若只書忌公, 則後之人, 不知見忌者爲何事, 故幷書之。 其時用事一二者之門, 一國大小之臣, 或自往, 或遣子弟, 無不致慇懃之意, 惟遇知於太祖, 足不一躡其門。 又出見忌之言, 臣實知之, 故不削此三字, 豈敢有一毫微意哉? 其行狀又曰: “及公沒, 忌公者典文, 始以表辭, 見責於帝。” 臣謂此典文之忌公者, 便是用事之忌公者無疑矣。 其行狀又曰: “太上王卽位, 用事者忌公, 誣公以罪, 欲置極刑。” 臣謂此用事者, 與前言用事者同是一人。 然臣之序文, 削去用事二字, 只書忌公者誣公以罪, 欲寘極刑。 臣竊恐太祖大王, 以聰明神武之資, 出於前朝之季, 功德旣崇, 反爲時君所忌, 危如累卵, 麾下奇計之士, 先出推戴之心, 積以歲月, 及至情見事迫, 然後太祖乃知之, 怒而益避, 衆心旣固, 不獲已卽位, 初豈有心於取國, 而預有命令哉? 其草昧之際, 奇計陰謀, 皆出於用事之臣, 若以爲不敢言用事者之所爲, 則卽位宥旨之後, 杖殺縊殺等事, 豈爲太祖之所知乎? 臣嘗聞散宜生之計, 文王不之知; 陳平六出之計, 漢祖不之知; 裵寂劉文靖之謀, 唐祖初不知; 苗訓之言, 趙普之謀, 宋祖初不知, 史策實書之。 後世之人, 知有聖德, 不知其小有可議。 況其用事之人挾私之事, 何不以實書之, 使後世之人, 有疑於聖德哉? 又況戊寅之秋, 向之用事者, 欲挾幼孼爲亂, 謀害宗親, 此亦豈太祖之所知哉? 殿下以宗社大計, 去此用事之輩, 然後宗社乃安, 式至今日。 戊寅之用事者, 乃其壬申之用事者也。 可不以實書之, 而庇護之哉? 當戊寅事定之後, 衆議欲誅用事者之長子, 臣謂大事旣定, 不可更有誅戮, 力言於殿下, 卽蒙殿下拒衆議而活之, 此殿下之所明知也。 不報復於其子之身, 欲以空言爲報復之計, 臣雖淺狹, 豈敢有此哉? 只緣庸暗, 牽於之行狀, 不能大加筆削, 使語意未瑩, 此則臣之罪也。 仰累殿下知人之明, 下負平日之所學, 慙愧之至, 措躬無地。 伏望殿下, 更垂矜察焉。 其三曰, 臣伏聞獻議者曰: “權近所撰李穡行狀, 曰用事者, 臣所撰碑文, 曰忌公者, 俱不書姓名, 是爲有罪。” 臣謹稽諸儒碑碣之文、言行之錄, 謹條列如左。 一, 韓文公柳子厚墓誌曰: “順宗卽位, 拜禮部員外郞, 遇用事者得罪, 例出爲刺史。” 一, 朱文公韓魏公言行錄曰: “祖宗舊法, 遵用斯久, 屬者遵一士之偏議, 變數朝之定律。” 撰富鄭公言行錄曰: “神宗卽位, 有於上前言災異皆天數, 非人事得失所致。 公聞之, 嘆曰: ‘人君所畏唯天, 若不畏天, 何事不爲!’ 此奸臣欲進邪說, 先導上無所畏, 使咈諫諍之臣, 此治亂之機也。” 撰歐陽文忠公言行錄曰: “公在翰林立言, 讖緯之說, 一切削去, 無誤後學, 執政者不甚主之, 竟不行。” 又曰: “除判太原府, 公辭求蔡州曰: ‘時多喜新奇, 而臣思守拙; 衆方興財利, 而臣欲循常。’ 執政知其終不附己。” 臣竊謂韓退之文章、朱文公道德, 後世學者之所慕效者也。 其於記事之文, 只書其人之行事, 而不書其姓名者, 爲文之法, 要有含蓄, 而使人思而得之也。 之不書姓名者, 豈非體此乎? 又聞獻議者, 以不附己三字爲說。 歐陽永叔, 先進老儒, 而王安石, 新進者也, 朱文公以知其不附己書之。 凡威勢之所在, 有欲者一皆趨附而取悅焉, 此所謂趨炎附熱者也。 , 先進老儒, 而當時用事者, 雖爲新進, 其勢不可不趨附也, 而一不造其門, 且出不直其人之言, 此其所以見忌也。 之所書, 豈非以此乎? 臣之序文, 削其用事二字, 不削其不附己三字者, 臣以學淺, 保之不誤, 臣至今日, 實以此爲悔。 衆議交集, 不量輕重, 欲加之罪, 伏蒙上慈明辨, 俾全性命, 臣心感謝之極, 天地日月, 實所照臨。 伏惟上鑑。 其四曰, 臣竊謂, 恭讓君卽位之初, 太祖當國, 忌者不過一二人, 太祖以禮待甚厚, 忌者屢欲寘危地, 太祖便救之得全。 臣豈不知此乃以太祖爲忌哉? 獻議者若謂太祖剛明, 不可謂有用事者, 則臣之序文曰: “忌公者誣公以罪, 欲加極刑。” 繼之曰: “王原之。” 其所以原之者, 乃太祖之剛明也, 何傷於聖德乎? 若謂太祖之時, 用事者之所爲皆是, 則將謂殿下定社之時, 諸功臣之所爲, 皆非矣。 殿下何不念此乎? 殿下以宗社大計, 去太祖之時用事之輩, 然後宗社乃安。 當使後世之人詠歌殿下之功德於無窮矣, 乃何欲庇護其用事者, 而反埋沒殿下之功臣乎? 權近所撰齊陵之碑、健元陵之碑, 皆著用事者之名, 又可得而盡庇護之哉? 伏望殿下更加聖慮。

태종 22권 11년 7월 2일 (신유) 005 / 하윤이 네 번이나 상소하여 무죄를 진달하다


공신과 대간에서 또 하윤·권근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용사자(用事者)라고 말한 것이 만일 대소를 가리켰다면, 경 등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마땅히 법으로 보였을 것인데, 경 등은 어찌 굳이 청하는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윤(河崙)이 네 번이나 상서(上書)하여 자기의 무죄함을 스스로 진달하니, 임금이 그 번쇄한 것을 싫어하여 그 글을 모두 돌려보내었다. 그 첫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이 불초하므로 탄핵을 당하였으니, 부끄럽고 한탄스러움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국가를 가진 이는 창업과 수성(守成)이 같지 않았습니다. 창업한 임금은 반드시 전대(前代)의 쇠하고 어지러운 말년에 나왔고, 반드시 호걸의 선비가 있어 마음으로 복종하고 꾀를 합하여 그 사이에 용사하여, 선비들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에게 붙는 자는 진용(進用)하고, 자기 일이 다른 자는 배척하였습니다. 옛 임금에게 친하고 옛 임금에게 충성하는 자는 모두 힘써 제거하고, 옛 임금의 세력이 위에서 고립되게 하여 온 조정의 신하가 하나도 꺼릴 만한 사람이 없게 한 뒤라야 큰 계교가 이루어졌으니, 위(魏)나라·진(晉)나라 이래 송[趙宋]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큰 일이 이미 이루어진 뒤에는 전대(前代) 때에 배척해버린 신하가 모두 쓰이게 되니, 이것은 이세(理勢)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가 신무(神武)와 불세(不世)의 덕으로 전조의 말년을 당해 장상(將相)을 겸임하였고, 거의(擧義)하여 회군한 뒤에는 중심(衆心)이 추대하기를 원하고 천명이 돌아왔으나, 전대(前代) 군신(君臣)의 분수가 아직 있어서 안위(安危)의 기틀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으니, 어찌 한두 가지 기이한 꾀를 가진 신하가 그 사이에 용사(用事)하여 자기에게 붙는 자는 끌어들이고, 자기와 다른 자는 배척한 뒤에야만 대업이 이루는 것이겠습니까? 이색이 전조에 있어 벼슬이 총재(冢宰)가 되어, 다만 상도(常道)를 지킬 줄만 알았으니, 용사하는 신하에게 꺼림을 당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권근이 이색의 행장(行狀)을 지어 말하기를,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에게 붙지 않는 것을 꺼리어 논핵하여 폄출(貶黜)하였다.’고 함은 오로지 중간의 용사하는 사람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물며, 윤이(尹彝)·이초(李初)가 여러 사람의 이름을 연서(連署)하여 중국(中國)에 글을 바쳐서 황자(皇子)를 맞이하기를 청하였으니, 본국의 풍속이 노비(奴婢)를 부리고 토전(土田)의 소출을 먹여서 집집마다 공후(公侯)의 낙(樂)이 있으니, 어찌 중국 사람을 얻어서 임금 삼기를 원하였겠습니까? 하물며 우현보(禹玄寶)는 손부(孫婦)의 아비가 임금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세우고자 하였겠습니까? 그것이 거짓 행위인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태조의 명예(明睿)하심으로 조금도 의심하려 하지 않으셨는데, 다만 한두 용사하는 신하가 예전에 원망이 있는 사람의 여러 이름 가운데에 있으므로 힘써 그 의논을 주장하여 그 죄를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하물며 태조가 추대될 때를 당해 겸양하여 굳이 거절하였으니, 즉위하던 날에 이르러 마땅히 관대한 인덕(仁德)을 베풀어 유신(惟新)의 화(化)를 이룰 것인데, 지난번의 용사하던 자가 반드시 묵은 원망를 갚고자 하여 이색 등에게 죄를 돌리었으니, 이것이 어찌 태조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수성(守成)하는 날에 미쳐서 용사하는 신하가 한 번도 전일에 하던 일과 같이 하지 못하였으니, 태조의 밝은 판단과 전일의 한 일이 과연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권근이 지은 행장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신이 이로써 서문(序文)을 지은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송나라 태조가 선위(禪位)를 받을 즈음에 조보(趙普)의 꾀와 한통(韓通)의 죽은 것을 사책에 모두 알지 못하는 것으로 썼으니, 그 관대한 덕이 더욱 후세에 빛났습니다. 만일 창업하여 처음 개국하던 때에 용사하는 신하의 기계(奇計)와 음모한 일이 모두 태조의 명령에서 나왔다 한다면, 이종학(李種學)을 목매어 죽이고, 이숭인(李崇仁)을 매질하여 죽인 것 같은 6,7인의 일이 어찌 태조의 아는 것이겠습니까? 만일 사실대로 용사하는 자의 한 짓으로 쓰지 않고 모두 태조에게서 나온 것처럼 한다면, 신은 태조의 성덕(盛德)의 빛이 후세에 누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성학(聖學)이 밝고 넓으시어 의리가 정미한 것을 통하여 마지 않음이 없으니, 다행히 성려(聖慮)를 더하시어 너그럽게 면하는 것을 입게 하면, 살아 있는 자가 어찌 충성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죽은 자가 어찌 결초(結草)하기를 생각하여 성덕의 만분의 일을 갚기를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그 두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臣) 하윤은 용렬하고 어두워 과오를 범해 죄가 불측함에 있는데, 전하의 깊이 살피시고 밝게 판단하심을 입어서 신으로 하여금 자취를 감추고 죄를 뉘우치게 하셨으니, 재생의 은혜가 실로 천지와 같습니다. 감격한 정을 어찌 이루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권근이 지은 이색의 행장에 이르기를,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公)이 자기에게 붙좇지 않는 것을 꺼리어 탄핵하여 장단(長湍)에 내치었다.’ 하였는데, 신은 생각하기를 공양군 때에 임금과 정승 사이에서 용사한 자가 1,2인에 지나지 않는 것은 나라 사람이 함께 아는 것입니다. 권근이 어찌 용사(用事) 두 글자를 가지고 태조를 가리켰겠습니까? 신이 서문에서 ‘용사’자를 깎아버리고, 다만 공(公)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꺼리어 논핵하여 장단에 폄출하였다.’고 쓰고, 불부기(不附己) 세 글자를 버리지 않은 것은 만일 다만 공을 꺼렸다고만 쓴다면, 후세 사람들이 꺼림을 당한 것이 무슨 일 때문인지 알지 못하겠기 때문에 아울러 쓴 것입니다. 그때 용사하는 한두 사람의 문(門)에 일국의 대소 신하가 혹은 자기가 가고 혹은 자제를 보내어 은근한 뜻을 보이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오직 이색은 태조에게 지우(知遇)가 있어 한 번도 그 문에 발걸음하지 않았고, 또 꺼림을 받을 말을 한 사실도 신이 실로 압니다. 그러므로 이 세 글자를 깎지 않은 것이지, 어찌 감히 일호라도 은미한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 행장에 또 말하기를, ‘공이 죽은 뒤에 공을 꺼리는 문형(文衡)을 맡은 자가 비로소 표사(表辭)로 황제에게 견책을 당하였다.’ 하였으니, 신은 전문(典文)한 기공자(忌公者)가 곧 용사한 기공자임이 틀림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행장에 또 말하기를, ‘태상왕(太上王)이 즉위하자, 용사하는 자가 공을 꺼리어 공을 죄로 무함하여 극형에 두고자 하였다.’ 하였는데, 신은 이 용사자와 앞서 말한 용사자가 동일한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신의 서문에는 ‘용사(用事)’ 두 자를 깎아버리고 다만 ‘공을 꺼리는 자가 공을 죄로 무함하여 극형에 두고자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태조 대왕께서 총명 신무(神武)한 자품으로 전조의 말년에 나시어 공과 덕이 이미 높았으므로, 도리어 그때 임금의 꺼림을 받아 위태하기가 누란(累卵)의 형세와 같았습니다. 휘하(麾下)의 기계(奇計)를 가진 선비가 먼저 추대할 마음을 내어 세월이 흐를수록 정상이 나타나고, 일이 긴박하게 된 뒤에야 태조가 아시고 노하여 더욱 사피(辭避)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이미 굳어져서 부득이 즉위하였으니, 처음에 어찌 나라를 취하려는 데에 마음이 있어 미리 명령이 있었겠습니까? 초창기(草創期)에는 기계(奇計)한 음모가 모두 용사하는 신하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만일 용사자의 한 일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한다면, 즉위하여 유지(宥旨)를 내린 뒤에 때려서 죽이고 목매어 죽인 따위의 일이 어찌 태조가 아시는 것이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들으니, 산의생(散宜生)이 주(紂)에게 뇌물을 준 계책을 문왕(文王)이 알지 못하였고, 진평(陳平)이 여섯 번 낸 계책을 한 고조(漢高祖)가 알지 못했으며, 배적(裵寂)·유문정(劉文靖)의 꾀를 당 고조(唐高祖)가 처음에 알지 못하였고, 묘훈(苗訓)의 말과 조보(趙普)의 꾀를 송 태조(宋太祖)가 처음에 알지 못하였는데, 사책(史策)에 사실대로 썼으므로 후세 사람이 성덕이 있는 것을 알고 조금도 의논할 것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용사(用事)하는 사람이 협사(挾私)한 일을 어찌 사실대로 쓰지 않아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성덕(聖德)에 대하여 의심이 있게 하겠습니까? 하물며 무인년 가을에 지난번의 용사(用事)하던 자가 어린 얼자(孼子)를 끼고 난을 꾸미어 종친을 해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태조의 아는 것이겠습니까? 전하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로서 이 용사하는 무리를 제거한 뒤에 종사가 편안해져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무인년에 용사(用事)한 자가 곧 임신년에 용사한 자이니, 사실대로 쓰지 않고 비호(庇護)할 수 있겠습니까? 무인년에 일이 진정된 뒤를 당하여 중의(衆議)가 용사자의 맏아들을 죽이고자 하였는데, 신이 생각하기를, 큰 일이 이미 정하여졌으니, 다시 주륙(誅戮)이 있을 수 없다고 하여 힘써 전하께 말씀드렸습니다. 곧 전하가 여러 의논을 거절하고 살리었으니, 이것은 전하가 밝게 아시는 것입니다. 그 자식의 몸에 보복하지 않고 빈말로 보복의 계교를 하고자 하였다면 신이 비록 얕고 좁으나 어찌 감히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용렬하고 우둔함으로 인연하여 권근이 지은 행장에 끌리어 크게 필삭(筆削)을 가하지 못하여 말 뜻이 분명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위로는 전하의 사람을 알아보시는 밝으심을 더럽히고 아래로는 평일의 배운 것을 저버렸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어 몸둘 땅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는 다시 불쌍히 여겨 살피소서.”

그 세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이 엎드려 들으니, 헌의(獻議)하는 자가 말하기를, ‘권근이 지은 이색의 행장에 ‘용사자(用事者)’라고 말하고, 신이 지은 비문(碑文)에 ‘기공자(忌公者)’라 하고 모두 성명(姓名)을 쓰지 않았으니, 이것이 죄가 된다.’고 하나, 신은 삼가 당(唐)나라·송(宋)나라 제유(諸儒)의 비갈문(碑碣文)과 언행록(言行錄)을 상고하여 삼가 조목으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1. 한문공(韓文公)이 유자후(柳子厚)의 묘지(墓誌)에 이르기를, ‘순종(順宗)이 즉위하자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을 제수하였는데, 용사(用事)하는 자를 만나 득죄하여 전례에 따라 나가서 자사(刺史)가 되었다.’하였고,

1. 주문공(朱文公)이 지은 한위공(韓魏公)의 언행록(言行錄)에 이르기를, ‘조종(祖宗)의 옛법을 준용(遵用)한 지가 오래인데, 근자에 한 선비의 편벽된 의논을 따라 여러 조정의 정률(定律)이 변하였다.’하였고, 부정공(富鄭公)이 지은 언행록에 이르기를, ‘신종(神宗)이 즉위하자, 상(上)의 앞에서 「재이(災異)는 모두 천수(天數)이고, 인사(人事) 득실(得失)의 소치(所致)가 아니라.」고 말한 자가 있었는데, 공이 듣고 탄식하기를, 「인군(人君)이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늘인데, 만일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이것은 간신(奸臣)의 간사한 말을 드리고자 하여 먼저 주상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도록 인도하여 간쟁(諫爭)하는 신하를 어기게 한 것이니, 이것은 치란(治亂)의 기틀이라.」고 하였다.’ 하였고,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의 언행록을 찬(撰)하기를, ‘공이 한림(翰林)에 있을 때 입언(立言)하기를, 「참위(讖緯)의 설(說)은 일체 깎아 없애서 후학을 그르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집정자(執政者)가 심히 주장하지 않아서 마침내 행하지 못하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판태원부(判太原府)를 제수하였는데 공이 사양하고 채주(蔡州)를 구(求)하여 말하기를, 「때는 신기(新奇)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신은 졸(拙)한 것을 지키기를 생각하고, 여러 사람을 바야흐로 재리(財利)를 일으키는데, 신은 상도(常道)를 따르고자 합니다.」하니, 집정(執政)이 마침내 자기를 따르지 않을 것[不附己]을 알았다.’ 하였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한퇴지(韓退之)의 문장과 주문공(朱文公)의 도덕은 후세 학자가 사모하고 본받는 바인데, 일을 기록하는 글에 다만 그 사람의 행한 일만 쓰고 그 성명은 쓰지 않았으니, 문장을 쓰는 법이 요컨대 함축(含蓄)이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알아내게 하는 것입니다. 권근이 성명을 쓰지 않은 것이 어찌 이것을 법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헌의자(獻議者)가 불부기(不附己) 3자로 말을 한다고 하는데, 구양영숙(歐陽永叔)은 선진(先進)인 노유(老儒)이고, 왕안석(王安石)은 신진(新進)한 자인데, 주문공(朱文公)이 지기불부기(知其不附己)라고 썼으니, 무릇 위엄과 세력이 있는 곳에는 욕망이 있는 자가 일체 모두 달려가 붙어서 환심을 사려 하니, 이것이 이른바, ‘염(炎)에 나아가고 열(熱)에 붙는다.’는 것입니다. 이색(李穡)은 선진 노유(先進老儒)이고, 당시에 용사하는 자는 비록 신진이지마는 그 세력이 추부(趨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색이 한 번도 그집에 가지 않고, 또 그 사람을 곧게 여기지 않는 말을 하였으니, 이것이 꺼림을 받은 까닭입니다. 권근이 쓴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신의 서문에 용사(用事) 2자는 깎고, 불부기(不附己) 3자는 깎지 않은 것은 신의 얕은 학식으로 권근의 그릇되지 않은 것을 보증한 것인데, 신이 오늘에 이르러 실로 이것을 가지고 후회합니다. 여러 의논이 서로 모이어 경중을 헤아리지 않고 죄를 가하고자 하는데, 상자(上慈)께서 밝게 분별하심을 입어서 성명(性命)을 보전하게 하니, 신의 지극히 감사한 마음은 천지 일월이 실로 조림(照臨)하는 바입니다. 엎드려 상감(上監)을 바랍니다.”

그 네 번째 글은 이러하였다.

“신 하윤은 생각하건대,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던 처음에 태조(太祖)가 당국(當國)하였는데, 이색을 꺼리는 자는 한두 사람에 불과하였습니다. 태조가 이색을 예로 대접하기를 심히 후하게 하여 이색을 꺼리는 자가 여러 번 위태한 땅에 두려고 하였으나, 태조가 곧 구제하여 보전되었는데, 신이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여 태조가 이색을 꺼렸다고 하였겠습니까? 만일 태조의 감명하심으로 용사하는 자가 있을 수 없다고 하면, 신의 서문에 말하기를, ‘공(公)을 꺼리는 자가 공(公)을 죄로 무함하여 극형을 가하고자 하였다.’ 할 것입니다. 또 이어 말하기를, ‘왕이 용서하였다.’ 하였으니, 용서하신 것은 태조의 감명하신 것입니다. 무엇이 성덕에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태조 때에 용사자의 한 일이 모두 옳다고 한다면, 장차 전하가 정사(定社)하던 때에 여러 공신들이 한 일이 모두 그르다고 하여야 할 것이니, 전하는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못합니까? 전하가 종사의 대계로 태조 때에 용사하던 무리를 제거한 뒤에 종사가 편하여졌으니, 마땅히 후에 사람으로 하여금 전하의 공덕을 무궁하게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그 용사하던 자를 비호(庇護)하고자 하여 도리어 전하의 공신(功臣)을 능멸하겠습니까? 권근이 지은 제릉(齊陵)의 비문과 건원릉(健元陵) 비문에 모두 용사한 자의 이름을 나타냈으니, 또 다 비호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는 다시 성려(聖慮)를 더하소서.”

【원전】 1 집 592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정론(政論) / *변란(變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