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에는 조선교육협회 창설회장,
1922년에는 중국 북경에서 열린 세계 학생Y 연맹(WSCF) 세계대회에 한국대표단장,
1923년에는 연합소년척후단(오늘의 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
1924년에는 조선일보 사장,
1925년에는 제1회 전국기자대회의 명사회자로 좌우 격돌로 해산 직전의 위기를 수습,
1927년에는 소위 민족의 단일당인 신간회 초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22년 WSCF 세계대회 때 상해임시정부 대표들이 북경에 까지 찾아와서
선생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모시려 했으나
"나까지 나라안에서 빠져나가면 국내에 있는 동포들이 불쌍하지 않소!"하며 이를 거절했다.
각 신문과 지도자 시인들은 선생을
'젊음의 구원조선', '백발청년', '겨레의 아버지', '대한의 성웅',
'높고 높은 태산의 준령', '조선의 거인' 등으로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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