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이윤명의 수계첩 뒤에 제하다[題李允明修稧帖後]

천하한량 2007. 3. 9. 18:37
이윤명의 수계첩 뒤에 제하다[題李允明修稧帖後]

옛날에 풍 좨주(馮祭酒)시문(時文) 짓기를 좋아하니 자백대사(紫栢大師)는 글을 써서 가르치기를 "시의(時義)는 짓지 않아도 좋으니 곧 아랑(阿郞)과 아울러 서로 아는 사람이 가르침을 구하는 경우에는 마음에 맞도록 요량하여 주면 족한 것이라 옛날에 이백시(李伯時)가 말을 그리자 수철(秀鐵)은 면대하여 꾸짖으며 ‘반드시 말의 뱃속에 들어가고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오늘날 시문에 마음 두는 사람들이 심술이 순량(純良)하면 하루아침에 출신(出身)하여 좋은 벼슬을 해도 또한 유익하지만 만약 심술이 좋지 못한데 이를 빙자하여 출신해서 대도(大盜)가 되어 사람을 겁치게 된다면 선생의 죄는 이백시보다 더욱 심합니다."라 했다.
이는 시문가(時文家)에 있어 입목삼분(入木三分)의 말이 되는 것이니 근일에 시문을 잘하는 자는 더욱 마땅히 크게 경동(警動)하여 벽에 달아 놓고 옥척(玉尺)을 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금년은 바로 계축년이요 때는 모춘(暮春)이라서 난정의 고사를 본떠 계(稧)를 닦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소·장(少長)이 다 모였으며 그 소·장들은 바로 시문의 웅(雄)이었다. 옛사람들이 이날을 택하여 계를 닦는 까닭은 상서롭지 못한 것을 불제(祓除)하는 의이며 술마시고 읊조리고 창서(暢敍)하는 것은 단지 광경(光景)에 유련(流連)하고 말자는 것이 아니다. 우러러 우주의 큼을 보고 아래로 품류(品類)의 성함을 살핌에 있어 심술의 바름에 나오지 않음이 있다면 또한 어떻게 눈을 놀리고 회포를 달림이 있단 말인가.
소·장과 군현(群賢)들은 다 다른 날 출신하여 세상을 상서롭게 할 자들이며 그들이 빙자하여 출신하는 것은 시문에 있는데 근세의 시문이란 다 천자(穿刺)에만 공교하여 귀굴(鬼窟)과 마도(魔途)로만 치달리니 너무도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이 모임을 인하여 깊이 자백(紫栢)의 심술에 대한 경계를 강구하여 일체 그 시문의 상서롭지 못한 것은 불제해 버리고 뱉으면 지영(芝英)이 되고 맺히면 단전(丹篆)을 이루어 대아(大雅)부륜(扶輪)하고 위체(僞體)를 별재(別裁)하며 정부(貞符)로 몸을 보호하고 서채(瑞采)를 아름답게 한다면 역시 사문(斯文)에 느꺼움이 있게 될 것이다.
노우(老友) 윤명(允明)은 계서(稧序)를 요청하는데 곧 시문가이며 이랑(二郞)은 난옥(蘭玉)이 다투어 피어나는데 아울러 시문을 익히고 있으므로 이를 써서 보답한다.

[주D-001]풍 좨주(馮祭酒) : 명인(明人)인 듯한데 이름은 미상임. 대고(待考).
[주D-002]시문(時文) : 고문(古文)을 상대하여 말이 된 것인데 응시(應時)의 문(文)을 이름. 송(宋) 여본중(呂本中) 《사우잡지(師友雜志)》에 "왕신민(王信民)이 남성시(南省試)에 제일(第一)이 되자 자못 시문(時文)을 수축(收畜)하므로 사무일(謝無逸)은 말하기를 "전일에는 이 짓을 한 것은 벼슬을 구하기 위함이었지만 지금도 오히려 그렇게 나간다면 이는 그칠 때가 없을 것이다." 하니, 시민은 모아놓았던 "시문을 다 꺼내어 불태워버렸다."고 함.
[주D-003]자백대사(紫柏大師) : 명 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진(可眞), 호는 달관(達觀)인데 연경(燕京)에다 법당을 크게 세웠다. 뒤에 무고(誣告)에 걸려 세상을 마쳤음. 《자백노인집(紫柏老人集)》이 세상에 전함.
[주D-004]이백시(李伯時) : 송(宋) 서주인(舒州人)으로 이름은 공린(公麟), 자는 백시요, 원우(元祐) 진사로 사주녹사참군(泗州錄事參軍)이 되었다. 시(詩)에 장(長)하여 기자(奇字)를 많이 알고 더욱이 산수(山水)와 불상(佛像)을 잘 그려서 산수는 이사훈(李思訓)과 같고 불상은 오도자(吳道子)에 가까웠다. 용면산장(龍眠山莊)에 귀로(歸老)하여 용면산인(龍眠山人)이라 호하였음.
[주D-005]입목삼분(入木三分) : 심각함을 이름. 진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축판(祝板)에 글씨를 썼는데 공인(工人)이 깎아 보니 필묵이 나무에 서푼 남짓 들어가 있었다. 《서단(書斷)》에 보이는데 그 필력(筆力)이 강함을 말한 것이다.
[주D-006]대아(大雅) : 《시(詩)》 대서(大序)에 "아(雅)라는 것은 정(正)이다. 왕정(王政)의 폐흥하는 이유이니 그러므로 소아(小雅)도 있고 대아도 있다." 하였음. 지금 문인(文人)들이 서로 호칭하면서 항상 대아라 이름.
[주D-007]부륜(扶輪) : 《남제서(南齊書)》 악지(樂志) 남교가사(南郊歌辭)에 "月御按節 星驅扶輪"이 있음.
[주D-008]위체(僞體)를 별재(別裁)하며 : 위체를 선별해서 가려낸다는 뜻임. 두보 시에 "別裁僞體 親風雅 轉益多師是我師"의 구가 있음.
[주D-009]난옥(蘭玉) : 지란(芝蘭)·옥수(玉樹)의 합칭인데 준수한 자제를 칭하는 말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