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난정의 뒤에 쓰다[書蘭亭後]

천하한량 2007. 3. 9. 18:34
난정의 뒤에 쓰다[書蘭亭後]

난정 백이십 종은 이미 내부(內府)로 들어와 수장되었으며 유왕(裕王)의 저중(邸中)에서 일찍이 한번 빌려나온 일이 있었는데 자획(字畫)이 엉뚱하게 달라서 사람의 의사 밖에 뛰어난 것이 있었으나 바깥 사람은 그를 볼 길이 없었다. 인간에는 오히려 조자고의 낙수본·조오흥의 십삼발신여잔본(十三跋燼餘殘本)·고목난원본(古木蘭院本)·국학천사암본(國學天師庵本)·왕문혜본(王文惠本)·상구진씨 송탁구본(商邱陳氏宋拓舊本)·영정본(穎井本)·왕추평신룡구탁본(王秋坪神龍舊拓本)들이 있어 모두 다 산음의 진영(眞影)을 찾아 거슬러볼 만한 것들이다.
위강(僞絳)의 제1·제2본과 비각속첩(祕閣續帖)의 유무언(劉無言)이 모한 신룡본(神龍本)과 손퇴곡(孫退谷)의 지지각본(知止閣本)·진각장진궐삼항본(陳刻藏眞闕三行本)·희홍(戲鴻)·추벽(秋碧)·쾌설(快雪) 여러 본은 비록 각각 전번(轉翻)하여 진·와(眞訛)가 서로 섞였으나 역시 다 조본(祖本)과 계류(系流)를 찾아 볼 만한 것들이다.
이 때문에 백석(白石)의 편방고(扁旁攷) 밖에 구자손(九字損)·오자손(五字損)·군(群) 자에 대한 정무의 측하(側下)와 저무의 평정(平頂)과 차각(杈脚)이 있고 없는 것의 혹은 3층 2층이며 숭(崇) 자에 대한 산하(山下)의 세작은 점이 혹은 보이고 혹은 안 보이는 곳, 천(遷) 자의 입이 벌어지고 입이 안 벌어지고 등이 서로 대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전하는 난정모본은 정무에서 나왔다고는 이르지만 정무의 여러 증거와 하나도 합하는 것이 없으니 필경 이것은 무슨 본인지 모르며 비해당(匪懈堂)의 제한 바로 미루어 보면 하나의 선본을 얻은 것도 같은데 지금 추구할 길이 없다.
예전에 소재(蘇齋)·운대(芸臺) 여러 명석(名碩)들을 추종하여 그 서여(緖餘)를 들었고 또 여러 본에 대하여 자못 눈으로 본 것도 있기 때문에 거듭 전몽(前夢)을 거슬러 대략 여기에 기록하는 바이다.

[주D-001]위강(僞絳) : 위본(僞本)의 강첩(絳帖)을 이름. 강첩은 송 상서랑(尙書郞) 반사단(潘師旦)이 관첩(官帖)을 집에서 모각(摸刻)하여 석본(石本)으로 만들었는데 세상에서 이것을 반부마첩(潘駙馬帖)이라 일컫는다. 무릇 20권이다. 선병문(單炳文)이 이르기를 "순화첩(淳化帖)은 흔히 보지 못하며 그 다음은 강첩이 가장 아름다운데 구본(舊本)은 역시 얻기 어렵다. 반씨의 아들이 분산(分産)하여 살면서 법첩도 나누어져서 둘이 되었다."라 하였음. 《輟耕錄》 강요장(姜堯章)이 《강첩평(絳帖評)》10권을 저술하여 세상에 유행한다고 함. 《齊東野語》
[주D-002]손퇴곡(孫退谷) : 청 익도인(益都人)으로 이름은 승택(承澤)이고 호는 퇴곡이다. 명 숭정(崇禎) 진사로 관은 급사중(給事中)이며 이자성(李自成)이 참위(僭位)하자 사천 방어사(四川防禦使)가 되었으며 청에 들어와 벼슬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이르렀다. 수장(收藏)이 심히 풍부하였으며 저술로는 《경자소하기(庚子銷夏記)》 및 《상서집해(尙書集解)》 등이 있음.
[주D-003]백석(白石)의 편방고(扁旁攷) : 강 백석(姜白石) 《난정편방고(蘭亭扁旁攷)》를 말함. 백석은 송 반양인(鄱陽人)으로 이름은 기(夔), 자는 요장(堯章)인데 무강(武康)에 우거(寓居)하여 백석동천(白石洞天)과 더불어 이웃이 되었으므로 호를 백석도인(白石道人)이라 하였다. 그는 일찍이 난정(蘭亭) 자체(字體)에 대하여 정무본(定武本)을 주로 삼아 《편방고》 1권을 저술하였는데 뒤에 난정의 진위(眞僞)를 가리는 지침이 되었음.
[주D-004]비해당(匪懈堂) :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인데 서법이 기절(奇絶)하여 천하 제일이라 칭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