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국학본 난정첩 뒤에 제하다[題國學本蘭亭帖後]

천하한량 2007. 3. 9. 18:33
국학본 난정첩 뒤에 제하다[題國學本蘭亭帖後]

이는 바로 천사암본(天師庵本)인데 원석(原石)은 상기도 연경(燕京)의 태학(太學)에 있어 혹은 국학본(國學本)이라고도 칭하는 것이며 영상본(穎上本)은 아니다. 그런데 이애당(伊藹堂)은 어찌하여 제정(題定)하여 영상(穎上)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대개 난정(蘭亭)은 두 본(本)이 있어 하나는 구본(歐本)인데 즉 정무본(定武本)이요, 하나는 저모(褚模)인데 즉 저본(褚本)이다. 정무와 저본은 자못 달라서 천여 년 이래로 유전된 것이 백으로 돌고 천으로 변했지만 이 두 본이 각기 스스로 파열(派裂)된 것이요, 실상 다른 본은 없다. 국학본은 곧 정무본이요, 영상본은 곧 저모본이다.
영본은 이를테면, ‘재계축(在癸丑)’이라는 세 글자가 공결(空缺)되었으며 ‘군(群)’ 자의 이마는 회인(懷仁)이 집자(集字)한 저본과 서로 합하여 ‘대(帶)’ 자의 끝 직획(直劃)은 살짝 횡사(橫斜)되었으며 ‘인(引)’ 자의 바른편 직획은 드리워 첨(尖)하며 ‘쾌(快)’ 자의 방주(旁注)에는 하나의 작은 ‘쾌’ 자가 붙었으니 이런 점이 바로 영본의 증거인데 이 본에 대하여는 당초에 이와 같은 한 가지 증(證)도 없다.
국학본은 이를테면 ‘급기소지(及其所之)’의 ‘지(之)’ 자와 ‘종기어진(終期於盡)’이란 ‘진’ 자와 ‘사생역(死生亦)’의 ‘역’ 자가 정무의 원본과 더불어 사뭇 달라서 이것이 바로 국학본의 증거인데 이 본이 하나하나 다 맞으니 국·영의 분변은 다시 논할 것이 없다.
이 본은 국학본의 가장 오래된 탑본으로 대단한 희귀품이며 조자고(趙子固)의 낙수본(落水本), 조문민(趙文敏)의 십삼발본(十三跋本), 소기간(蘇耆簡)의 궐삼행본(闕三行本)은 비록 지금 보존되어 있기는 하지만 해외 사람으로서는 얻어볼 수 없는 것인데 다행히도 이 석(石)이 있어 송각(宋刻)이 되어 산음(山陰)의 유법을 소급할 수 있으니 반드시 영본에 영(靈)을 의뢰할 필요도 없으며 하물며 또 영본이 이 본보다 나음이 없음에서랴.
이애당의 첨제(籤題)한 필의(筆意)는 저체를 깊이 터득하여 결코 속필(俗筆)이 아닌데 한 번 그와 더불어 대증할 길이 없음이 한스러울 뿐이다.

[주D-001]이애당(伊藹堂) : 청 복건(福建) 영화인(寧化人)으로 이름은 병수(秉綬), 자는 조사(組似), 호는 묵경(墨卿), 또는 애당인데 건륭 진사로 호남(湖南)에 전시(典試)하였으며 양주지부(揚州知府)로 세상을 마쳤다. 시(詩)에 공(工)하며 예법(隷法)에 더욱 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