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청애당첩 뒤에 제하다[題淸愛堂帖後]

천하한량 2007. 3. 9. 18:31
청애당첩 뒤에 제하다[題淸愛堂帖後]

진성재(陳星齋)가 이르기를 "당은 법에 얽매이고 송은 뜻을 취했으니 천년이라 진의 운(韻)은 끝내 뉘라 분별할꼬[唐拘於法宋取意 晉韻千秋竟誰辯]"라 하였으니 이는 서가(書家)의 삼매(三昧)라 하겠다.
유석암(劉石菴) 글씨가 자못 진의 운치를 얻었다 하겠으며 당시의 서가로는 으뜸으로 하의문(何義門)·강서명(姜西溟)·조대경(趙大鯨)을 추대하는 자가 있었고 왕의산(王擬山)·진향천(陳香泉)·왕퇴곡(王退谷)을 추대하는 자도 있었으며 또 옹담계(翁覃溪)·성친왕(成親王)·양산주(梁山舟)·왕몽루(王夢樓) 같은 이들이 서로 갑을(甲乙)을 다퉜고 또 장득천(張得天)·공홍곡(孔葒谷) 같은 여러 사람들이 한 시대 병랑(炳朗)하였으나 부득불 석암을 거벽(巨擘)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 글씨가 후(厚)하면서도 능히 탈속(脫俗)하여 옛사람에 들어가 옛사람을 벗어났으며 만년(晩年)의 묘경(妙境)은 측량 못할 만큼 신명(神明)하였다.
일찍이 유운방(劉雲房) 상서(尙書)의 집 벽 사면에 동으로부터 서에까지는 죄다 옥판지(玉版紙)에 쓴 석암의 글씨인데 글자 크기가 어린 아이들의 손바닥만씩 하며 또 작은 아이의 먹장난과도 같았으나 다 필묵의 혜경(蹊逕)을 벗어나서 천의(天衣)라 꿰맨 흔적이 없고 제주(帝珠)가 서로 비춰, 인력으로는 가늠할 바 아니며 백력(魄力)이 너무 커서 퇴장어밀(退藏於密)도 할 만하고 육합(六合)에 가득 찰 만도 하니 동향광(董香光) 이후로는 처음 있는 글씨이다.
동향광 글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대단찮게 여겨 혹은 전혀 아름답고 화려한 것만 일삼는다고 하는데 이는 동서(董書)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왜이냐, 우리나라 사람을 들어 논한다면 한석봉의 기격(氣格)은 동의 열에 하나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광(眼光)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데 또 어찌 석암을 논할 수 있겠는가.
유문정(劉文正)의 글씨는 또 극히 공(工)하다. 일찍이 그가 쓴 도덕경(道德經)의 승두세자(蠅頭細字)를 보았는데 문형산(文衡山)의 금강경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며 그 아래 석암의 발어(跋語) 세서(細書)는 도리어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영지(靈芝)와 예천(醴泉)은 과연 본원(本源)이 있는 것인가.
병진년(丙辰年) 인일(人日)에 쓰다. 바로 석암이 이 권(卷)을 쓴 일주갑(一周甲)의 해이다.

[주D-001]진성재(陳星齋) : 청 전당인(錢塘人)으로 이름은 조륜(兆崙), 자는 성재, 호는 구산(句山)임. 옹정(雍正) 진사로 관은 통정사(通政使)에 이르렀고 시문(詩文)이 순고 담박(淳古淡泊)하여 경사(京師)의 사대부들이 받들어 문장의 종장(宗匠)으로 삼았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서법이 제일이고 문(文)은 그 다음이다." 하였음.
[주D-002]유석암(劉石菴) : 청 제성인(諸城人)으로 이름은 용(墉), 자는 숭여(崇如), 호는 석암이며 건륭 진사로 관은 동각태학사(東閣太學士)에 이르렀다. 선서(善書)하여 이름이 천하에 가득하므로 정치와 문장이 다 서명(書名)에 덮여졌음. 시(諡)는 문청(文淸)임.
[주D-003]하의문(何義門)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작(焯), 자는 기첨(屺瞻), 호는 다선(茶仙)인데 학자가 의문 선생(義門先生)이라 칭하였음. 강희(康熙) 때 사진사(賜進士)로 관은 편수(編修)이다. 수만 권의 서적을 수장하였으며 그 장서한 곳은 뇌연재(賚硯齋)라 하였다. 《의문독서기(義門讀書記)》가 있어 세상에 행한다.
[주D-004]강서명(姜西溟) : 청 자계인(慈谿人)으로 이름은 신영(宸英)인데, 시(詩)·고문(古文)에 공(工)하고 서법에 정하였으며, 주이준(朱彝尊)·엄승손(嚴繩孫)으로 더불어 강남삼포의(江南三布衣)라 일렀다. 나이 70에 진사를 얻어 순천고관(順天考官)이 되었다가 죄를 얻어 옥중에서 죽었다. 저술로는 《기원집(淇園集)》이 있음.
[주D-005]진향천(陳香泉) : 청 해녕인(海寧人)으로 자는 육겸(六謙), 일자(一字)는 자문(子文), 호는 향천인데 공생(貢生)으로 관은 남안지부(南安知府)였으며, 서(書)와 시(詩)에 공(工)하였다. 여녕당첩(予寧堂帖)과 고란재필(皐蘭載筆)이 있음.
[주D-006]왕퇴곡(汪退谷) : 청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사굉(士鋐), 자는 문승(文升), 호는 퇴곡이며 또 호는 추천(秋泉), 또는 송남거사(松南居士)라고도 하였음. 강희 진사로 관은 우중윤(右中允)에 이르고 시문(詩文)에 공하며 서법에 더욱 정하여 강신영(姜宸英)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였음.
[주D-007]양산주(梁山舟) : 청인으로 자는 원영(元穎)인데 세상에서 산주 선생이라 칭하며 말년에는 불옹(不翁)이라 자서(自署)하였다. 서법에 공하여 처음에는 안·유(顔柳)를 본받고 이어 미법(米法)을 사용하여 늦게 더욱 변화하였으나 순전히 자연에 맡겨 이름을 천하에 떨쳤으며, 시에 능하고 더욱 상감(賞鑑)에 정하였다. 93세에 죽었다. 죽기 수일전에 자수(自手)로 부고(訃告)를 썼는데 필법이 창경(蒼勁)하여 평시와 같았음.
[주D-008]왕몽루(王夢樓) : 청 단도인(丹徒人)으로 이름은 문치(文治), 자는 우경(禹卿), 호는 몽루인데 젊어서부터 문장과 서법으로 천하에 일컬어졌음. 건륭 진사로 임안부(臨安府)에 출수(出守)하였다. 뒤에 불계(佛戒)를 가졌으며 문장이 괴려(瑰麗)를 숭상하였는데 늘그막에는 한결같이 평담(平淡)으로 돌아갔으며, 그 시와 서는 능히 고금의 변(變)을 다하여 스스로 한 체를 이루었다. 저술로는 《몽루시집》이 있음.
[주D-009]공홍곡(孔葒谷) : 청 순곡(蒓谷) 계함(繼涵)의 아우로 이름은 계순(繼蒓), 자는 신부(信夫), 호는 홍곡이며, 건륭 거인으로 후보증서(候補中書)이며 서(書)에 공(工)하였다. 형부 상서 장조(張照)의 여부(女夫)가 되어 그 필법을 터득하여 소사구(小司寇)라는 지목이 있었음.
[주D-010]퇴장어밀(退藏於密) : 《역(易)》 계사 상(繫辭上)에 나온 것으로 말하자면 그 도가 심미(深微)하여 물은 일용(日用)해도 능히 그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것임. 《중용(中庸)》 전(傳)에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其書 卷之則退藏於密 放之則彌六合"이라 하였음.
[주D-011]유문정(劉文正) : 청 제성인(諸城人)으로 이름은 통훈(統勳), 자는 연청(延淸), 호는 이둔(爾鈍)인데 옹정(雍正) 진사로 관은 동각태학사(東閣太學士)에 이르러 태자태보(太子太保)를 가했으며, 옛 대신의 풍이 있었음. 건륭 38년에 사고전서정총재(四庫全書正總裁)가 되었으며 75세에 졸하니, 황제는 그 공을 추상(追賞)하여 문정(文正)이라 시호를 내리고 그 아들 용(墉)에게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1부를 하사하였음.
[주D-012]문형산(文衡山) : 명 장주인(長洲人)으로 이름은 징명(徵明)인데 초명(初名)은 벽(璧), 자는 징중(徵中), 호는 형산거사(衡山居士)이다. 한림대조(翰林待詔)를 제수하였는데 뒤에 치사(致仕)하였으며, 시문·서화가 다 공(工)한데 그림이 더욱 승(勝)하여 세상에서는 그 그림을 칭하여 조맹부(趙孟頫)·예찬(倪瓚)·황공망(黃公望)의 장점을 겸유했다고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