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파의 난권에 쓰다[題石坡蘭卷] |
난(蘭)을 그리기가 가장 어렵다. 산수(山水)·매죽(梅竹)·화훼(花卉)·금어(禽魚)에 대하여는 예로부터 그에 능한 자가 많았으나 유독 난을 그리는 데는 특별히 소문난 이가 없었다. 이를테면 산수로서 송·원(宋元) 이래 남·북(南北)의 명적(名蹟)이 하나 둘로 헤아릴 바 아니나 왕숙명(王叔明)·황공망(黃公望)이 아울러 난마저 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대의 문호주(文湖州 문징명(文徵明))와 매(梅)의 양보지(楊補之)도 역시 난마저 잘하지는 못했다.
대개 난은 정소남(鄭所南)으로부터 비로소 나타나서 조이재(趙彝齋 조자고(趙子固))가 으뜸이 되었으니 이는 인품이 고고(高古)하고 특절(特絶)하지 않으면 하수(下手)하기가 쉽지 않다.
문형산(文衡山) 이후로 강·절(江浙) 사이에서 마침내 크게 유행되었지만 그러나 문형산은 서화가 심히 많으며 그가 난을 그린 것은 또 그 작품의 열에 하나 둘도 안 되니 그 드물게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함부로 그려 횡소난말(橫掃亂抹)하기를 요즘처럼 조금도 꺼림이 없이 사람마다 다하게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소남이 그린 것을 일찍이 본 바 있는데 지금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은 겨우 일본(一本)일 따름이다. 그 잎과 그 꽃은 근일에 그린다는 자들과는 너무도 달라서 함부로 의모(擬摹)할 수도 없으며 조이재 이후로는 오히려 그 신모(神貌)와 계경(蹊徑)을 찾을 수는 있으나 방모(仿模)에 이르러서는 또 갑자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정·조 두 사람은 인품이 고고하고 특절하므로 화풍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범인으로는 쫓아가 발을 밟을 수 없는 것이다.
근대에는 진원소(陳元素), 승(僧) 백정(白丁), 석도(石濤)로부터 정판교(鄭板橋) 전택석(錢籜石) 같은 이에 이르러는 본시 난을 전공한 이들로서 인품 또한 다 고고하여 무리에 뛰어났으므로 화품 또한 따라서 오르내리게 되며 단지 화품만을 들어 논정할 수는 없다.
우선 화품으로부터 말한다면 형사(形似)에도 달려 있지 않고 계경(蹊逕)에도 달려 있지 않으며 또 화법만 가지고서 들어가는 것을 절대 꺼리며 또 많이 그린 후라야 가능하고 당장에 부처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며 또 맨손으로 용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구천 구백 구십 구분까지 이르러 갔다 해도 그 나머지 일분이 가장 원만하게 성취하기 어려우며 구천 구백 구십 구분은 거의 다 가능하겠지만 이 일분은 인력으로는 가능한 것이 아니며 역시 인력 밖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는 것은 이 의를 알지 못하니 모두 망작(妄作)인 것이다.
석파는 난에 깊으니 대개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서로 근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갈 것은 다만 이 일분의 공(工)이다.
나는 몹시 노둔(鹵鈍)한데다 지금은 또 여지없는 전복(顚覆)의 신세라서 난표봉박(鸞飄鳳泊)이 되어 그리지 않은 지 하마 이십여 년이다. 사람들이 혹 와서 요구하면 일체 못한다고 사절하여 마치 마른 나무와 차가운 재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았는데 석파가 그린 것을 보니 하남(河南) 선생이 사냥꾼을 본 생각이 든다.
그래서 비록 스스로 그리지는 못할망정 전일의 아는 것을 들어 경솔히 쓰기를 이와 같이 하여 석파에게 부치는 바이니 모름지기 뜻과 힘을 오로지하여 나감과 동시에 다시는 이 퇴원(退院) 노추(老錐)로 하여금 더하지 못할 것을 더하도록 하여 나의 자작(自作)에 나음이 있게 말 것이며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고 싶어하는 자는 석파에게 요구함이 옳을 것이다.
[주C-001]석파(石坡) :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호임. 조선조 있어 난(蘭)의 제일 명수(名手)라 칭함.
[주D-001]왕숙명(王叔明) : 원(元) 오홍인(吳興人)으로 이름은 몽(蒙), 자는 숙명, 호는 황학산초(黃鶴山樵)인데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의 외손이다. 그는 외가의 법을 얻어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또 당송(唐宋)의 명가(名家)를 범섭(泛涉)하여 동원(董源) 왕회(王淮)로 스승을 삼았으므로 종일(縱逸)하고 묵법(墨法)이 수윤(秀潤)하여 원조(元朝) 사대가(四大家)의 하나가 되었음.
[주D-002]양보지(楊補之) : 명 나라 사람인데 사매(寫梅)로써 고금에 유명함.
[주D-003]정소남(鄭所南) : 송 연강인(連江人)으로 일명은 사초(思肖)인데 태학 상사(太學上舍)로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였으며 강개하여 지조가 있었다. 송이 망하자 사초라고 이름을 고쳤으니 조실(趙室)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이요, 소남이라 한 것은 다시 다른 성(姓)에게 북면(北面)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이다. 오하(吳下)에 은거하여 조객(朝客)과 서로 내왕하지 않으며 난(蘭)을 그려 자기 뜻을 붙였는데 난만 그리고 땅은 그리지 않았음.
[주D-004]진원소(陳元素) : 명 장주인(長洲人)으로 자는 고백(古白) 사시(私諡)는 정문 선생(貞文先生)인데 시문(詩文)에 공(工)하고 해(楷)는 구양(歐陽)을 본받고 초(草)는 이왕(二王)에 들었으며, 산수에 공하되 난을 잘 그렸음.
[주D-005]백정(白丁) : 청승(淸僧)인데 운남인(雲南人)으로 난을 잘 그렸음. 그래서 사람들이 판교(板橋)의 화란(畫蘭)이 백정을 배웠다고 칭함.
[주D-006]석도(石濤) : 청승으로 이름은 도제(道濟), 자는 석도, 호는 청상노인(淸湘老人)인데 팔대산인(八大山人)과 동시이며 분예(分隷)에 정(精)하고 산수·난·죽을 잘 그렸다. 그 필의(筆意)가 종자(縱恣)하여 강(江) 이남에서는 제일이라 칭하였음. 저술로는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畫語錄)》이 있음.
[주D-007]전택석(錢籜石) : 청인으로 이름은 재(載), 자는 곤일(坤一), 호는 탁석, 또 호는 포준(匏尊)임. 경사(京師)에 여거(旅居)하였으며 남루노인(南樓老人)의 종증손(從曾孫)이다. 건륭 진사로 학문이 연박(淵博)하고 품행이 수결(修潔)하며 공시 선화(工詩善畫)하였다. 그가 그린 난석(蘭石)은 신취(神趣)가 횡일(橫逸)하여 진속(塵俗)을 벗어났음.
[주D-008]하남(河南) 선생이……생각 : 정명도(程明道)의 이름은 호(顥)요, 자는 백순(伯淳)인데 하남인이다. 일찍이 주염계 무숙(周濂溪茂叔)을 뵌 자리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16~17세의 나이에 전렵(田獵)을 좋아하였는데 그 이후로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자, 염계는 " 어찌 말을 쉽게 하는가. 그 마음이 잠은(潛隱)하여 바라지 않을 뿐일세."라 했으며, 그 뒤에 저물게 돌아오면서 사냥꾼을 보고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무숙의 전언(前言)을 생각했다고 함.
[주D-009]노추(老錐) : 노고추(老古錐)와 같은 말로서 제5권 주 88) 참조.
[주D-001]왕숙명(王叔明) : 원(元) 오홍인(吳興人)으로 이름은 몽(蒙), 자는 숙명, 호는 황학산초(黃鶴山樵)인데 송설(松雪) 조맹부(趙孟頫)의 외손이다. 그는 외가의 법을 얻어 산수화를 잘 그렸으며, 또 당송(唐宋)의 명가(名家)를 범섭(泛涉)하여 동원(董源) 왕회(王淮)로 스승을 삼았으므로 종일(縱逸)하고 묵법(墨法)이 수윤(秀潤)하여 원조(元朝) 사대가(四大家)의 하나가 되었음.
[주D-002]양보지(楊補之) : 명 나라 사람인데 사매(寫梅)로써 고금에 유명함.
[주D-003]정소남(鄭所南) : 송 연강인(連江人)으로 일명은 사초(思肖)인데 태학 상사(太學上舍)로서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였으며 강개하여 지조가 있었다. 송이 망하자 사초라고 이름을 고쳤으니 조실(趙室)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이요, 소남이라 한 것은 다시 다른 성(姓)에게 북면(北面)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줌이다. 오하(吳下)에 은거하여 조객(朝客)과 서로 내왕하지 않으며 난(蘭)을 그려 자기 뜻을 붙였는데 난만 그리고 땅은 그리지 않았음.
[주D-004]진원소(陳元素) : 명 장주인(長洲人)으로 자는 고백(古白) 사시(私諡)는 정문 선생(貞文先生)인데 시문(詩文)에 공(工)하고 해(楷)는 구양(歐陽)을 본받고 초(草)는 이왕(二王)에 들었으며, 산수에 공하되 난을 잘 그렸음.
[주D-005]백정(白丁) : 청승(淸僧)인데 운남인(雲南人)으로 난을 잘 그렸음. 그래서 사람들이 판교(板橋)의 화란(畫蘭)이 백정을 배웠다고 칭함.
[주D-006]석도(石濤) : 청승으로 이름은 도제(道濟), 자는 석도, 호는 청상노인(淸湘老人)인데 팔대산인(八大山人)과 동시이며 분예(分隷)에 정(精)하고 산수·난·죽을 잘 그렸다. 그 필의(筆意)가 종자(縱恣)하여 강(江) 이남에서는 제일이라 칭하였음. 저술로는 《고과화상화어록(苦瓜和尙畫語錄)》이 있음.
[주D-007]전택석(錢籜石) : 청인으로 이름은 재(載), 자는 곤일(坤一), 호는 탁석, 또 호는 포준(匏尊)임. 경사(京師)에 여거(旅居)하였으며 남루노인(南樓老人)의 종증손(從曾孫)이다. 건륭 진사로 학문이 연박(淵博)하고 품행이 수결(修潔)하며 공시 선화(工詩善畫)하였다. 그가 그린 난석(蘭石)은 신취(神趣)가 횡일(橫逸)하여 진속(塵俗)을 벗어났음.
[주D-008]하남(河南) 선생이……생각 : 정명도(程明道)의 이름은 호(顥)요, 자는 백순(伯淳)인데 하남인이다. 일찍이 주염계 무숙(周濂溪茂叔)을 뵌 자리에서 스스로 말하기를 "16~17세의 나이에 전렵(田獵)을 좋아하였는데 그 이후로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자, 염계는 " 어찌 말을 쉽게 하는가. 그 마음이 잠은(潛隱)하여 바라지 않을 뿐일세."라 했으며, 그 뒤에 저물게 돌아오면서 사냥꾼을 보고 저도 모르게 기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무숙의 전언(前言)을 생각했다고 함.
[주D-009]노추(老錐) : 노고추(老古錐)와 같은 말로서 제5권 주 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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