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원교필결 뒤에 쓰다[書圓嶠筆訣後]

천하한량 2007. 3. 9. 18:31
원교필결 뒤에 쓰다[書圓嶠筆訣後]

원교(圓嶠)의 필결(筆訣)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엽 이래로 다 언필(偃筆)의 서(書)이다. 그래서 획의 위와 왼편은 호(毫) 끝이 발라가기 때문에 먹이 짙고 미끄러우며, 아래와 바른편은 호의 중심이 지나가기 때문에 먹이 묽고 까끄러움과 동시에 획은 다 편고(偏枯)가 되어 완전하지 못하다."
이 설(說)이 하나의 횡획(橫畫)을 사분해서 벽파하여 세미한 데까지 분석한 것 같으나 가장 말이 되지 않는다. 위에는 단지 왼편만 있고 바른편은 없으며 아래에는 단지 바른편만 있고 왼편은 없단 말인가? 호 끝이 발라가는 것은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호 중심이 지나가는 것은 위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횡획이 이미 이와 같을진댄 수획(竪畫)은 또 어떻다는 건가.
농담(濃淡)과 활삽(滑澁)이란 본시 먹 쓰는 법에 달린 것이요 용필(用筆)의 언(偃)과 직(直)을 탓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가에는 필법이 있고 또 묵법(墨法)이 있는데 이 필결 속에는 묵법에 영향된 것이 하나도 없으니 대개 필법만 들어 논하면 이미 이것이 편고이며 필법을 논하면서 먹과 필을 나누어 놓지 아니하고 두루뭉수리로 말하여 구별한 바가 없으니 어느 것이 이 묵이며 어느 것이 이 필인지를 모를 지경인데 이러고서 말이 된다 할 수 있겠는가.
원교의 글씨를 보니 현완(懸腕)하고서 쓴 게 아니다. 무릇 글자를 쓸 때 현완하고 현완하지 않은 것은 자획의 사이를 보면 그림자도 도망갈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속일 수 있으랴.
원교에게 친히 배운 여러 사람들도 역시 다 알지 못한다. 이랬기 때문에 필결 속에는 현완에 대한 한 글자도 미치지 않은 것이니 현완을 한 연후에야 붓 쓰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현완을 안 하고서는 어떻게 붓을 씀에 있어 언(偃)이니 직(直)이니 말할 수 있으랴. 그가 깊이 언필을 책한 것도 무엇을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고려 말 이래로 우리나라 초엽에 이르러 이군해(李君侅)·공부(孔俯)·강희안(姜希顔)·성
달생(成達生) 같은 여러 명공(名公)들이 용이 날고 봉이 나래하듯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이들이 어찌 일찍이 한 파(波)나 한 점(點)의 언필이 있었으며 또 숭례문(崇禮門)·흥인지문(興仁之門)·홍화문(弘化門)·대성전(大成殿)의 편액 같은 것이 어찌 언필로써 쓸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 이른바 언필이란 어느 사람의 글씨를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다.
또 이를테면 "획을 일으켜 호(毫)를 펴고 가면 아래는 날랜 칼이 가로 깎은 것 같다."는 것은 아무래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가령 펴진 호가 날랜 칼이 가로 깎은 것같이 하려면 마땅히 일종의 필을 따로 만들어 마치 화공의 편필(匾筆)이나 도배장이의 풀비 모양 같이 돼야만 법에 맞게 할 수 있는데 지금 유행하는 조심필(棗心筆)로서는 손을 댈 수가 없을 것이다.
그가 또 말한 "굳건히 붓을 다진다.[堅築筆]"라는 것은 고금 서가가 듣지 못한 비결이다. 축필(築筆)이란 것은 반드시 점을 연해 찍는 곳에 있어 긴히 다붙이는 의(義)로서 빙(冫)과 같은 것이 이것이며 횡·직·과·파(橫直戈波)의 여러 획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붓이 먼저 가고 손은 뒤에 간다[筆先手後]는 것은 더욱 뒷사람에게 보여줄 것이 못 된다. 서가가 먼저 할 것은 현완과 현비(懸臂)에 있어 마침내는 온 몸의 힘을 다 쓰는 데까지 이르는데 지금 ‘붓이 먼저요 손은 뒤라.’ 하고 또 ‘온 몸의 힘을 다해 보낸다.’ 했으니 붓이 먼저 갔는데 어떻게 손과 몸에 의뢰할 수 있는가. 선후가 모순되어 스스로 그 예(例)를 어지럽히며 조리가 닿지 않으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으리오.
점의 법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형체는 비록 뾰족하나 호는 다 편다."라 한 것은 이 또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호를 펴는 한 법으로서 과·파·점·획에 두루 다 쓰고 싶은데 가장 점의 법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이런 견강부회(牽强附會)의 말을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무릇 뾰족하다는 것은 모아서 합쳐놓은 것이요 편다는 것은 흩어놓은 것이니 뾰족한 것을 펴서 만들 수 없고 펴진 것을 뾰족하게 만들 수 없다. 뾰족하고 편 것은 형체가 달라서 서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편호로써 뾰족한 형을 만든단 말인가.
결구(結構)라는 것은 필진도(筆陣圖)에서 이를 들어 모략(謀略)이라 했다. 아무리 칼과 갑옷이 정(精)하고 날래며 성지(城池)가 굳고 튼튼할지라도 모략이 아니면 손을 놀릴 수가 없게 되므로 이 때문에 서가는 가장 결구를 중히 여긴다.
종유(鍾繇)·색정(索靖)으로부터 근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서가는 일정하여 감히 바꾸지 못하는 결구법이 있으니 이를테면 왼편이 짧을 경우에는 위를 가지런히 하고 바른편이 짧을 경우에는 아래를 가지런히 하는 유로서 낱낱이 들어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이른바 결구라는 것은 전혀 착락(着落)이 없어 옛사람들이 서로 전하는 진체(眞諦)와 묘결(妙訣)은 하나도 미친 바 없으니 대개 그 글씨가 결구의 한 법에 있어서는 더욱 억견(臆見)으로서 벽을 향하여 헛되이 만든 것이라 그 추악한 것은 형용할 수 없는데 도리어 구·안(歐顔)으로서 방판(方板)의 일률(一律)이라 하여 심지어는 이들이 모두 왕우군(王右軍)을 글씨로 여기지 않은 과정을 밟았다 일렀으니 이는 어찌 무숙(武叔)이 성인을 헐뜯고 파순(波旬)이 부처를 비방한 것과 다르리오. 이는 더욱 먼저 벽파(闢破)해야 할 것이다.
"자상히 우군의 제첩(諸帖)에 준(準)해 보면 내 말이 근본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말은 우군의 어느 첩을 지적한 것인지 모르겠으며, 그가 이르는 "동쪽 사람은 고루하여 고거(考据)를 모른다."는 것은 단지 필진도를 능히 분변 못한다는 말이며 우군의 제첩에 이르러는 과연 다 고거할 수가 없는 것인데 곧장 내 말이 근본이 있음을 들어 증명할 수 있으랴.
시험삼아 논한다면 악의론(樂毅論)은 이미 당 나라 때부터 진모본(眞模本)은 얻기 어려웠고 황정경(黃庭經)은 우군의 글씨가 아니며 유교경(遺敎經)은 곧 당 나라 경생(經生)의 글씨요 동방삭찬(東方朔讚)과 조아비(曹娥碑)는 그것이 어느 본에서 나왔는지 모르니 서가로서 안목을 갖춘 자는 곧장 유식자는 응당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순화각(淳化閣)의 제첩은 진안(眞贋)이 혼잡한 동시에 무진무진 번와(翻訛)되어 가장 표준할 것이 못 되며 하물며, 우군이 고을을 잃고 선령(先靈)에 고한 이후로는 대략 자수(自手)로 쓰지 않고 대서(代書)하는 한 사람을 두었는데 세상에서 능히 구별을 못하고서 그 느리고 이상한 것을 보면 호칭하여 만년의 글씨로 삼는데 이를 제외하고 또 우군의 어느 첩이 있어서 내 말이 근본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단 말인가.
그가 한예(漢隷)를 품제(品第)하면서 예기비(禮器碑)를 들어 제일이라 했고 곽비(郭碑)를 들어 후세에 나왔다 했으니 이는 구안(具眼)이라 일컬을 만한데 갑자기 수선(受禪)을 예기와 아울러 들었고 심지어는 공화(孔龢)·공주(孔宙)·형방(衡方) 제비(諸碑)가 다 수선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무엇을 근거삼아 한 말인지 모르겠다.
한예는 비록 환·영(桓靈) 시대 말조(末造)라도 위예(魏隷)와는 너무도 같지 아니하여 한계를 그어 놓은 것과 같은데 수선은 바로 위예로서 순전히 방정(方整)을 취하여 이미 당예(唐隷)의 조짐을 열어 놓았으니 어찌 예기와 더불어 병칭할 수 있으며 도리어 공화·공주의 위에 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아는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아서 자못 측량을 못하겠다.
아, 세상이 다 원교의 필명(筆名)에 진요(震耀)가 되어서 그의 상·좌·하·우·신호(伸毫)·필선(筆先) 제설(諸說)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며 한번 그 미혹(迷惑)의 속으로 들어가면 의혹을 타파할 수 없게 되므로 참람하고 망령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큰 소리로 외쳐 심한 말을 꺼리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하는 바다.
그러나 이 어찌 원교의 허물이랴. 그 천품이 남달리 초월(超越)하여 그 재주는 지녔으나 그 학(學)이 없는 것이요, 또 그 허물이 아니다. 고금의 법서(法書)와 선본(善本)을 얻어보지 못하고 또 대방가(大方家)에게 나아가 취정을 못하고 다만 초이한 천품만 가지고서 그 고답적인 오견(傲見)만 세우며 재량을 할 줄 모르니 이는 숙계(叔季) 이래의 사람으로서 면하지 못하는 바이다. 그의 ‘옛을 배우지 아니하고 정(情)에 인연하여 도를 버리는 자들에게 뜻을 전한 것’은 사뭇 자신을 두고 이른 말인 것도 같다. 만약 선본을 얻어보고 또 유도(有道)에게 나아갔던들 그 천품(天品)으로써 이에 국한되고 말았겠는가.

[주D-001]무숙(武叔)이……헐뜯고 :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라는 대문이 있음.
[주D-002]파순(波旬)이……비방한 것 : 파순은 범어(梵語)로 불경에 나타나는데 그 의(義)는 악(惡)이 된다. 바로 석가가 출세(出世)할 때에 마왕(魔王)의 이름임. 천마(天魔)와도 같음.
[주D-003]순화각(淳化閣)의 제첩 : 각(閣)이 송 나라 순화 연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름이 된 것임. 태종(太宗)이 삼관(三館)의 서(書) 및 한(漢) 장지(張芝)·최원(崔瑗), 위(魏) 종요(鍾繇), 진(晉) 왕희지(王羲之), 그 아들 헌지(獻之), 유량(庾亮)·소자운(蕭子雲)·당 태종(唐太宗)·명황(明皇)·안진경(顔眞卿)·구양순(歐陽詢)·유공권(柳公權)·회소(懷素)·회인(懷仁) 등의 묵적(墨跡)을 뽑아서 그 각(閣)에 수장하고 한림시서(翰林侍書) 왕저(王著)를 명하여 각 안에 소장한 묵적 및 남당건업첩(南唐建業帖)을 금중(禁中)에서 모각(摸刻)하게 하여 정리해서 10권을 만들고 이름은 순화비각법첩(淳化祕閣法帖)이라 하였음. 청 건륭 때에 우민중(于敏中) 등에게 명하여 구모(鉤摸)해서 중각(重刻)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