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수비문 뒤에 제하다[題北狩碑文後] |
이는 바로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낡은 비(碑)이다. 비는 함경도 함흥(咸興) 황초령(黃草嶺)에 있었는데 비가 하 오래되어 닳고 벗겨졌는데 이재(彝齋) 상서(尙書)가 이 도(道)에 관찰사가 되어 인풍(仁風)을 선양하여 온갖 법도가 함께 흥기하니 잠긴 빛과 숨은 아름다움이 드러나고 열려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고적(古蹟)을 모으고 찾는 데까지에 미치어 이 비를 흙 속에서 얻었는데 이 비는 곧 우리나라 금석의 으뜸으로서 이천여 년의 묵은 자취가 다시 세상에 크게 밝혀졌으니 저 옛날 황룡(黃龍)·가화(嘉禾)·목련(木連)·감로(甘露)의 상서와 같을 뿐만이 아니라 너무도 성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일찍이 이 탁본(拓本)을 얻어 연월(年月)·지리·인명(人名)·직관(職官) 등을 증정(證定)하여 써서 비의 고(考)를 만들어 《해동금석록(海東金石錄)》과 《문헌비고(文獻備考)》의 그릇됨을 시정한 바 있었는데 지금의 잔석(殘石)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쉰다섯 글자나 더 많고 그 부스러져 손(損)된 것이 또 열여섯 글자나 된다.
진흥왕 이십구년이 중국에 있어서는 진(陳) 광대(光大) 이년·북제(北齊) 천통(天統) 사년·후주(後周) 천화(天和) 삼년·후량(後梁) 천보(天保) 칠년이 되며 비의 글자체는 제·양간의 잔비나 조상기(造像記)와 더불어 흡사하다.
대개 구양순(歐陽詢)의 흑수비(黑水碑)가 동으로 온 이후로 우리나라 비판(碑版)은 다 구의 체를 모방했으니 그 중화(中華)를 사모한 것은 진작 진흥왕 시대부터 이미 그러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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