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당김정희 ▒

이석견의 음시처 상량문의 뒤에 쓰다[題李石見吟詩處上樑文後]

천하한량 2007. 3. 9. 18:30
이석견의 음시처 상량문의 뒤에 쓰다[題李石見吟詩處上樑文後]

청(靑)과 적(赤)을 문(文)이라 이르고, 적(赤)과 백(白)을 장(章)이라 이른다. 문장(文章)의 시작인 동시에, 병체(騈體)의 근본된 바이다.
소명(昭明)이 선(選)에 부지런하여 이 규모(規模)를 법으로 삼고, 언화(彦和)가 글월을 저술하며 이 과율(科律)을 전했다.
그래서 용문(龍文)을 당시 포장(舖張)하고, 홍범(鴻範)을 후손에게 물려주어, 명당(明堂)부조(斧藻)는 화회(畫繢)를 보아 문채를 이루었고, 계사(階戺)의 생용(笙鏞)은 갱쟁(鏗錚)을 들어 박자에 응하지 않는 자 없었으며 서·유(徐庾)정시(正始)의 유파(流派)를 거스르고 온·이(溫李)의 번욕(繁縟)한 가락을 드날려서 이에 이르러 극치가 되었던 것이다.
전조(前調)가 차츰 멀어지고 이 풍(風)이 날로 떨어져서 관각(館閣)에 즈음하고 과구(科臼)의 사이에 찬연(鑽硏)하여 기(氣)로써 나아가는 데는 기저(機杼)가 크게 변하고 말을 이루는 데는 광경(光景)이 일신(一新)해졌다.
그러나 옷은 금수(錦繡)를 마다하여 포백(布帛)은 혹 화사함이 없게 되고 공장은 조기(雕幾)를 놓게 되니 거업(簴業)은 바탕이 깎이는 것을 싫어해서였다.
비록 새 격(格)이 따로 이루어졌으나 옛 뜻이 차츰 상실되어 다시는 삼당(三唐)의 구조(舊調)는 아니었다.
석견(石見) 선생은 천재가 특출할 뿐더러 혜업(慧業)도 일찍이 갖추어졌네. 천오(天吳)·자봉(紫鳳)은 곡절(曲折)이 종이 위에 옮기었고 단애(丹崖)와 취벽(翠壁)은 우뚝이 눈앞에 솟았도다. 맑은 흥취는 바람처럼 풍기고 빼어난 뜻은 구름 위로 피어올라 오악(五岳)에서 신명(神明)을 윤내고 삼소(三霄)에서 항해(沆瀣)로 양치질하니 한갓 향초(香草)의 정영(精英)을 걷어잡고 취규(翠虯)의 이채(異彩)를 드날릴 뿐이 아니며 칠요(七曜)와 오운(五雲)은 그 침심(沈深)과 해박(該博)을 고찰하고 춘기(春旂)와 양류(楊柳)는 우아와 화려를 도와주니 그 정(情)을 창조함에 있어서는 화사하면서도 빠지지 않고 그 물(物)을 체(體)함에 있어서는 주밀(綢密)해도 가늘지 않도다.
그러므로 능히 육범(六凡)을 넘어서고 오탁(五濁)을 뛰어넘어 휘날리고 휘날려 운오(雲璈)가 홀로 반주하고 천뢰(天籟)가 스스로 다른 것과 같으니 진실로 노·왕(盧王)이 금시(今時)에 나타나서 강하(江河)가 흘러 폐하지 않고 자운(子雲)이 후세에 나서 일월(日月)이 달린 양 깎이지 않은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도다.
현해(玄解)의 가까움으로써 독조(獨造)의 지혜를 운용하니 자기만이 홀로 아는 곳에 남은 알지 못하는 묘가 있어 저도 모르게 손짓하며 춤추며 발놀리며 구르게 되니 하사(下士)들은 이를 보고 크게 웃을 수밖에 없으리라.
미경당(味經堂)의 제이십사연(第二十四硯)을 시용(試用)하여 추사 거사 김정희는 제하다.

[주D-001]소명(昭明)이……부지런하여 : 소명은 양(梁) 소명태자 소통(蕭統)을 이름인데, 그가 《문선(文選)》을 편집하였음.
[주D-002]언화(彦和) : 남조(南朝) 양(梁) 동완인(東莞人) 유협(劉勰)의 자임. 천감(天監) 중에 동궁통사사인(東宮通事舍人)을 겸직하였으며 독지 호학(篤志好學)하여 《문심조룡(文心雕龍)》 50편을 찬술하였는데 고금 문체 및 문(文)의 공졸(工拙)을 논하였다. 그에 대하여 심약(沈約)은 깊이 문리(文理)를 얻었다 일렀음.
[주D-003]용문(龍文) : 필력의 웅건(雄健)함을 말한 것임. 본디 정문(鼎文)으로 반고(班固)의 보정시(寶鼎詩)에 "寶鼎見兮色紛縕 煥其炳兮被龍文"이라 했고, 한유(韓愈)의 증장십팔시(贈張十八詩)에 "龍文百斛鼎 筆力可獨扛"이라 하였음.
[주D-004]명당(明堂) : 정교(政敎)를 밝히는 당(堂)임.
[주D-005]부조(斧藻) : 수식(修飾)의 뜻임. 《양자법언(揚子法言)》 학행(學行)에 "吾未見好斧藻其德 若斧藻其楶者也"이라 하였음. 절(楶)은 양상(樑上)의 단주(短柱)이다.
[주D-006]서·유(徐庾) : 서는 서릉(徐陵)인데 남조(南朝) 진(陳) 섬인(剡人) 으로 자는 효목(孝穆)임. 8세에 능문(能文)하여 천상석기린(天上石麒麟)이라 칭하였음. 문장이 자못 구체(舊體)를 변하여 사조(辭藻)가 기려(綺麗)하였다. 신(庾信)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여 세상에서 부르기를 서유체(徐庾體)라 하였음.
[주D-007]정시(正始) : 연호인데 삼국(三國) 위(魏)의 소릉 여공(邵陵厲公)이 일컬었다. 그때 사대부들이 다투어 청담(淸談)을 숭상하여 세상에서는 정시의 풍(風)이라 일컬었으며 혜강(嵇康)·완 적(阮籍)의 제인의 시도 역시 정시체라 하였음.
[주D-008]온·이(溫李) : 온정균(溫庭筠)과 이상은(李商隱)을 이름. 온정균의 자는 비경(飛卿)인데 그 시가 염려(艶麗)하였다. 이상은과 더불어 제명(齊名)하여 세상에서는 온·이라 칭하였음.
[주D-009]기저(機杼) : 직구(織具)인데, 뒤에 가차하여 문(文)의 구조를 이름. 《위서(魏書)》 조형전(祖瑩傳)에 "조형이 항상 사람에게 말하기를 "文章須自出機杼 成一家風骨 何能共人同生活也" 하였음.
[주D-010]조기(雕幾) : 《예기(禮記)》 소의(少儀)에 "車不雕幾"라 했는데, 그 주(注)에 "조(雕)는 그림이고 기는 부전(附纏)하여 근악(釿鍔)을 만든 것이다." 하였음. 그 근악은 요철문(凹凸文)을 만드는 것인데, 요는 근이라 하고 철은 악이라 이름.
[주D-011]거업(簴業) : 종경(鐘磬)을 다는 물건임. 《시경(詩經)》 대아(大雅) 영대(靈臺)에 "簴業維樅"이라 하였음.
[주D-012]천오(天吳)·자봉(紫鳳) : 천오는 해신(海神)임. 두보의 북정시(北征詩)에 "海圖圻波濤 舊繡移曲折 天吳及紫鳳 顚倒在短褐"이라 하였음.
[주D-013]삼소(三霄) : 삼청(三淸)과 같은 말인데 도가어(道家語)임.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을 삼청이라 하여 모두 선인(仙人)의 소거(所居)로 침.
[주D-014]춘기(春旂)와 양류(楊柳) : 유신(庾信)의 마사부서(馬射賦序)에 "落花與芝蓋齊飛 楊柳共春旂一色"이라 하였음.
[주D-015]운오(雲璈) : 악기의 이름임. 《원사(元史)》 예악지(禮樂志)에 "雲璈 制以銅爲小鑼 十三同一架 下有長柄"이라 하였음.
[주D-016]노·왕(盧王) : 초당(初唐) 사대가인 노조린(盧照鄰)·왕발(王勃)을 합칭한 것임. 두보시에 "楊王盧駱當時體 輕薄爲文哂未休 爾曹身與名俱滅 不廢江河萬古流"가 있음.
[주D-017]자운(子雲) : 한(漢) 양웅(揚雄)의 자임.
[주D-018]일월(日月)이……않은 것 : 마멸될 수 없음을 말함. 유흠(劉歆)의 답양웅서(答揚雄書)에 "是懸諸日月 不刊之書也"라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