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수찬 돈인 이재의 허천기적 시권의 뒤에 제하다[題權修撰 敦仁 彝齋虛川記蹟詩卷後] |
허천(虛川)은 옛날의 속빈로(速頻路)인데 삼수(三水)의 하나이다.
금(金) 본기(本紀)에 이르기를 "도문수(徒門水)의 서쪽 혼동(渾疃)·성현(星顯)·잔준(僝蠢)·삼수 이북의 한전(閒田)은 갈뢰로(曷懶路)의 여러 모극(謀剋)에게 주다."라 했는데, 갈뢰로는 지금의 함흥이다. 혼동·성현·잔준이 삼수가 되기 때문에 삼수의 이름은 이로써 생긴 것이다.
이제 와서 상고해 보면 삼수의 치(治)는 곧 압록강이 그 북으로 지나가고 허천은 동쪽에 있으며 장진(長津)은 서쪽에 있는데 명칭이 달라진 것은 예와 이제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단지 갑산(甲山)만이 있어 바로 옛날의 허천부(虛川府)를 그대로 인한 것이며 삼수에는 설치한 부(府)가 없었는데 나누어 둘로 한 것은 우리 조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고구려에 있어서는 졸본(卒本)이 되었고 당 나라 때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로 예속되었다가 이윽고 발해에 들어가 솔빈부(率賓府)가 되었던 것이다.
요(遼)·금(金) 이래로는 혹은 속빈, 휼품(恤品), 소빈(蘇濱)이라 부르니, 다 어음(語音)의 변전(變轉)이며 졸본과 더불어 모두 하나이다. 금사(金史)에는 또 오연(烏延), 포할노(蒲豁奴, 속빈로, 성현하(星顯河)라고 칭했는데 사람들이 이 성현에 의거하여 삼수의 하나라고 하고 있으니 삼수가 속빈이 된 것은 더욱 확실하다.
대개 폐려연(廢閭延)으로부터 압록강 북쪽으로 삼·갑(三甲)에 미쳐서는 다 졸본의 땅인데 동쪽 사람들이 성천(成川)으로써 해당하게 한 것은 너무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
금년 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권 돈인 이재(權敦仁彝齋)가 예(禮)를 논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갔었는데 사월에 미쳐 은혜를 입어 돌아오면서 그 풍토(風土)와 민물(民物)을 매우 자상하게 기술하였다. 이를테면 동명(東明)·발해의 사적 같은 것은 지금 이미 까마득하게 멀지만 이는 실로 다섯 나라 응로(鷹路)의 인후(咽喉)이며 거란·여진의 백번 전쟁을 치른 지역으로서 경조(景祖)·목종(穆宗)의 유적을 오히려 거슬러 볼 수 있으려니와 도롱고(徒籠古)·흘석열(紇石烈)의 강계(疆界)도 또한 따라서 구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 수찬은 태평한 세상에 나서 성명(聖明)의 조정에 벼슬하는 처지라 말을 내면 생용(笙鏞)과 보불(黼黻)이 되고 걸음을 옮기면 문석(文石)과 이체(螭砌)를 떠나지 않을 처지였는데 마침내 먼 변방 동떨어진 지역 밖에서 초췌한 몸으로 다니며 노래하는 나머지에 이소(離騷)의 유우(幽憂)한 작품을 계속하면서 지경을 만나 감촉한 것과 정을 인연하여 기탁한 것이 봄철의 새와 가을철의 벌레처럼 끊어버릴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은 어찌해서인가.
후세의 보는 자가 그 세대를 논하며 그 사람을 알게 된다면 거의 수찬의 영광인 동시에 우리들의 부끄럼이 될 따름이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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